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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0492
한자 車原頫
영어음역 Cha Wonbu
이칭/별칭 사평(思平),운암(雲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미상
성별
생년 1320년연표보기
몰년 미상
본관 연안(延安)
대표관직 간의대부

[정의]

고려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잠시 활동했던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이바지한 연안차씨의 시조인 차효전(車孝全)의 20세손이며, 아버지는 지방어사(知防禦使)를 역임한 차종로(車宗老)이다. 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와의 사이에 1남 5녀를 두었다. 차원부는 정몽주와 길재(吉再)[1353~1419]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 72인 중의 한 사람이다.

[활동사항]

차원부는 고려 후기 1320년(충숙왕 7)에 차종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자질을 보였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사군자(四君子)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364년(공민왕 13) 문과를 통하여 관직에 오른 후 여러 요직을 거쳐 종3품 벼슬인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차원부는 고려 후기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구암마을로 내려와 이곳에다 정자를 짓고 시를 벗 삼으며 한가로운 생활을 하였다. 얼마 후에는 황해도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岩洞)으로 이주하여 세상과 연을 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찾아와 위화도 회군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회군을 성공한 뒤에는 개국공신으로 천거하려 했으나 거절하였으며, 정언(正言)·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398년(태조 7) 태조 는 차원부가 흙집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서 석 달 동안 하루에 다섯 번씩 평산으로 칙서를 보내 차원부를 불렀다. 차원부는 궁궐에서 보낸 말을 돌려보내고 나서 평복을 입고 입궐하여 왕위 계승 문제로 고뇌하던 태조에게 “시대가 태평할 때는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하고, 시대가 어지러울 때는 공로가 있는 자를 우선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조언하여 이방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 후 궁중에서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차원부는 다시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하륜(河崙)[1347~1416] 등이 보낸 자객에 의해 가족과 일행 80여 명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여 차원부의 아들 차안경(車安卿)에게 차원부의 증직 교지를 내렸지만, 차안경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으며, 부인 평산신씨는 왕명을 거절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손자인 차상도(車尙道)는 경상도 순흥으로 몸을 숨겨 고용살이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고, 그 증손자들은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지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 후손들은 지금도 여수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차원부가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강 위로 한 가닥 피리 소리 들리고/ 천리 밖 달빛 속에 배는 노니는데/ 백구조차 나를 알지 못하니/ 이 신세 외로이 물가에 앉아 있네.(一聲江上笛 千里月中舟 白鷗知我否 閒坐緣蘋洲)”

[상훈과 추모]

1589년(선조 22)에 간행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1456년(세조 2) 박팽년·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石亨) 등이 주석을 달고 선비 48명이 지은 칠언절구 72수의 추모시를 첨부하여 차원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를 임금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는 그 저자가 박팽년이 아니며, 내용 또한 위작이므로 차원부의 행적은 사실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1791년(정조 15) 교서감(校書監)에서 차원부의 유문(遺文)과 관련 기록을 모아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를 간행하였다. 『차문절공유사』는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선평리의 오천서원에 보관해 오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이 철폐되자 1897년(고종 34)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구암별묘(龜岩別廟)에 보관하였는데 여수비행장 확장 공사로 그 재실이 헐리어 지금은 광양의 연안차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차문절공유사』목판은 1999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12호로 지정되었다.

차원부는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伸寃)되어 시중(侍中)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차원부가 태종 때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의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이용자 의견
역**** 위서를 아직도 인용하다니... 2014.06.28
역**** 차원부설원기가 위서임은 다 아는 사실인데 아직도 이런글이... 2014.06.28
모* 위서라면 빨리 고쳐야 하는게 아닌가요... 2011.10.10
필** 고려및조선역사중에외하필이면,이부분만을꼭집어위서다뭐다하는지모르겠네요.위서일경우불이익을당하는부분은무엇인지궁금하네요. 2011.07.25
진** 안타깝지만 차원부설원기는 차천로란 사람이 쓴 위서입니다.
당시 일부 학자의 고증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남 유림마저 참고하여 족보를 치장한 사례가 있습니다.
차원부설원기는 조선 중기 아주 교묘하게 작성되어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여져왔습니다.

행여 이 차원부란 사람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한 적도 없고 그로 인해 원통하게 죽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잘 못된 것은 바로 잡음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201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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