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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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牛脣島 |
영어음역 | Usundo |
영어의미역 | Usundo Island |
이칭/별칭 | 우손도,우진도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적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길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적량동에 있던 섬.
[명칭유래]
섬의 모양이 소 혓바닥같이 생겼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자연환경]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퇴적층인 낙동층군하부에 속하는 퇴적암으로서 주변에는 간석지가 발달하였고, 북쪽에는 해식애가 나타난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현황]
여수시 삼일동에 있는 지역으로 묘도 남서쪽 광양만에 있으며,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육지와 섬사이가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우순도는 역사적으로 광양민란과 연관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1869년(고종 6년) 3월 30일 기록에 “전라 감사(全羅監司) 서상정(徐相鼎)이, 순천 부사(順天府使) 유협(柳𣇍)의 첩정(牒呈) 내에 ‘방금 본부의 삼일포면(三日浦面) 하적동(下赤洞) 동임(洞任)의 보고를 보니, 본동(本洞)에 소속된 우손도(牛孫島)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단지 최영길(崔永吉) 한 사람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달 21일 밤에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100여 명의 도적들이 배를 타고 와서 최가의 집에 뛰어들어 집안 기물을 전부 빼앗고 농사 소를 도살하고 물고기를 잡으려고 해도(海島)의 본동으로 들어간 어민 2명과 최가의 머슴 김 총각을 묶어서 배에 싣고 갔다.’고 하였으므로 보고를 받은 즉시 동에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보니, 도적의 배는 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최영길의 가족들에게 자세히 들어보니, ‘배는 2척인데 한 척은 돛을 하나 달고 다른 한 척은 돛을 두 개 달았으며, 그 도적 수를 세어 보니 100여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해적들이 집안 물건을 빼앗고 사람까지 싣고 간 것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군사를 많이 동원하여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는 이때에 어지러운 무리들이 섬의 백성들을 침범하여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막 다섯 진영에 관문을 보내 며칠 안으로 붙잡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실록에서 도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광양민란군을 말한다. 광양민란의 주모자들은 모두 전라도 출신으로 광양의 민회행(閔晦行)·이재문(李在文), 태인의 전찬문(田贊文), 남원의 권학여(權鶴汝), 강진의 강명좌(姜明佐)·김문도(金文道) 등으로 1868년 강진에 모여 거사를 기도한 것으로 봐서, 준비와 계획이 상당히 치밀하였던 것 같다. 이들은 1869년 3월 18일, 30여 명이 하동 장시(場市)에 모여 상선을 가장한 배에 올라 섬진강을 오르내리며 70여 명을 모아 순천부 삼일포면 하적동의 우손도(牛孫島)로 향하였다. 그곳의 유일한 거주자 최영길(崔永吉)의 집에서 소를 잡아 위로한 뒤 갑주(甲胄)와 죽창을 만들고 산제를 올려 난의 성공을 기원하였는데, 주문을 외고 제를 지낸 점이 특징이다. 민란군은 우손도를 떠나 광양현 초남포(草南浦)를 거쳐 24일 밤 현성(縣城)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무장한 본군 70여 명과 민란의 진행 과정에서 가담한 자들을 모두 합친 3백 명의 민란군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 기치를 들고 포를 쏘며 현성에 침입하였다.’ - 후략
여수시 삼일동에 있는 지역으로 묘도 남서쪽 광양만에 있으며,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육지와 섬 사이가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우순도가 있던 지역은 현재 GS칼텍스 여수 제2공장의 공장부지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