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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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利川徐氏 |
영어의미역 | Icheon Se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화장동 군장마을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서은부 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여수시 입향조.
[연원]
이천서씨의 시조는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의 후손 서신일(徐神逸)이라 한다. 기준(箕準)은 위만을 피하여 이천에 있는 서아성(徐阿城)에 살았다 하여 그 후손이 성을 서씨라 하고 본관을 이천(利川)이라 하였다.
[입향경위]
이천서씨 여수 입향조는 원숙공(元肅公) 서눌(徐訥) 파조의 17세손 서은부(徐殷富)이다. 서은부는 1566년(명종 21) 월동 갈밭골에 이천서씨로서는 최초로 여수에 입향했다. 문익공(文翼公) 서강(徐岡)의 후손 서산문이 1573년(선조 6) 능주에서 화장동 군장마을로, 역시 문익공 후손 서음(徐崟)이 1590년대에 화순에서 쌍봉동 시전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양경공(良景公) 서유(徐愈)의 후손 서하남(徐廈南)도 순천에서 와 오림동에 정착했다.
특히, 서음의 아들 서춘무(徐春武)가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휘하 부장으로 금산전에서 전사하여 선무녹훈과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충민공(忠敏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종손 서명일(徐命逸)이 1630년대에 신기동 기전마을에 입향하고 아우 서명복(徐命福)이 봉계동으로 분가하여 그곳의 입향조가 되었다. 5세손 서지은(徐之銀)은 화정면 백야리에, 7세손 서재방(徐再方)이 다시 여수 오천동에 각각 출향하였다. 또, 서필문(徐必文)은 별장 벼슬을 지냈는데, 영조 때 능주에서 율촌면 구암마을로 이주했다.
[현황]
입향조 서은부의 5세손 서천로(徐天老) 때에 홍수로 인해 갈밭골에서 평사마을·평려마을·남수마을·칠성마을 등 인근 지역으로 분가하여 정착했다. 서산문(徐山汶)의 후손은 16세손에 이르러 화장동 군장마을 중심으로, 서음(徐崟)의 후손은 시전마을과 오천마을 중심으로, 서필문의 후손은 구암마을 중심으로 살았다. 그러나 세거지가 여수산업단지로 조성되고 신도시로 변하여 시내 및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주하였다.
[관련유적]
여수시 삼일동 중흥마을에 입향조 서은부를 제향한 영산재(靈山齋)가 있다. 영산재는 1975년에 문중에서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