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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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居姓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하여 살아오고 있는 성씨.
[개설]
세거 성씨는 전근대 사회에서 지역 사회의 토착 세력으로 향촌 사회를 좌우하며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함께 농민층을 지배하였다. 예산 지역의 세거 성씨는 크게 토착 성씨와 이거 성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토착 성씨]
토성 이족 집단은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예산 지역의 유력한 재지 세력으로, 1432년(세종 14)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1481년(성종 12) 편찬하여 1530년(중종 25) 증보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토착 성씨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가지 기록을 바탕으로 지금의 예산군을 구성하고 있는 조선시대 예산현·대흥현·덕산현 3개 군현의 토착 성씨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예산현의 토착 성씨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본현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예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인 심(沈)·장(張)·신(申)·손(孫)이 있고, 화물장(化物莊)과 문석소(文石所)의 망성(亡姓)인 방(方)씨가 있었다. 그리고 문석소의 속성(續姓)으로 심(沈)씨가 있었다.
100여 년이 지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 조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본현 성씨가 신·손·심·장씨로 등재 순서가 바뀌었고, 속성으로 심씨가 있다고 하여 기존 문석소의 속성이 별도의 구분 없이 본현 속성으로 들어갔다. 화물의 방씨는 문석과 같다고 부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인물 조에 오른 사람은 효자 김근(金勤)과 이개우(李開右), 호장(戶長) 장중연(張仲淵)의 딸 열녀 매읍덕(每邑德)이다. 김씨나 이씨는 토착 성씨 목록에는 보이지 않는 성씨이므로 조선 초에 입향한 이거 성씨인 듯하나, 호장 장중연은 예산을 본관으로 하는 예산장씨이다.
둘째, 대흥현의 토착 성씨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본현 토성은 이(李)·한(韓)·백(白)의 세 성씨가 있고, 망성으로 장(張)·오(吳)씨가 있다. 거변소(居邊所)의 속성은 홍(洪)·이(李)씨가 있는데, 이 중 이씨의 자손이 향역(鄕役)에 종사한다는 부기가 있어, 대흥 향리 성씨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현 성씨가 이·한·장·오·백씨이고, 거변(居邊)의 홍·이씨가 등재되었는데, 망성인 장·오씨가 모두 본현에 들어가고 기존 본현 토성 세 번째였던 백씨보다 순위가 앞서 있다. 인물 조에는 고려 사람 한문준(韓文俊)이 있어서 대흥한씨의 존재가 확인된다. 고려 때의 이성만(李成萬)과 이순(李淳) 형제는 효행과 우애로 포상된 인물로 토착 향리 집안이었다. 본현 성씨 중 첫 번째로 등재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한씨가 위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물 조에 수록된 고려 열녀 곽씨(郭氏)는 박근(朴根)의 아내였는데, 곽씨와 박씨 모두 성씨 조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려 말~조선 초에 입향한 당대의 재지 세력이었다.
셋째, 덕산현은 고려 말까지 덕풍(德豐)과 이산(伊山) 2개 고을이었던 것을 합쳐 덕산현으로 편제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지리지에는 이 두 개 고을의 성씨가 각각 나누어 등재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덕풍 성씨는 황(黃)·송(宋)·이(李)·윤(尹), 이산 성씨는 고(高)·오(吳)·문(文)·송(宋)씨이며, 각 성씨와 순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동일하다. 다만 추가된 것은 신곡소(薪谷所)의 장(蔣)씨이다. 덕산에 속해 있던 소(所)는 내박(乃朴)과 신곡(薪谷) 두 곳이었는데, 성씨는 신곡소만 있다. 인물 조에 등재된 인물은 없다. 이들 토성 세력은 고려 말까지 지방의 토호적 성격을 가지면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장층(戶長層)이었다. 호장층은 조선 건국 후 성리학적 지배 질서가 강화되고, 수령을 통한 지방 지배를 관철하려던 조선 건국 시에 중앙 정부의 집요한 노력에 의하여 대부분 행정 실무층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렇지만 세종 대까지만 해도 세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들 중 대부분은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이거 사족(移居士族)들과 혼인 관계를 갖거나, 혹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사족 가문으로 변신한 후 향촌 사회에서의 주도권을 계속 영위하게 된다.
2015년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예산군에 거주하고 있는 토착 성씨는 예산송씨(禮山宋氏) 64명, 대흥백씨(大興白氏) 71명으로 파악되었고, 충청남도에 거주하는 토착 성씨는 대흥이씨(大興李氏) 87명, 덕산 황씨 72명, 덕산이씨(德山李氏) 147명으로 조사되었다.
[이거 성씨]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예산 지역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토착 성씨가 난을 피해 예산을 떠나기도 하는 한편, 새로운 사람이 예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이거하는 사람들은 이미 예산과 관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해미·태안·서산 등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이었거나, 예산 사족과 혼맥(婚脈)을 이루고 있던 관계였다거나, 이미 선대부터 예산에 농장을 가지고 예산의 사족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경우였다. 따라서 이때 이주한 사람은 짧은 시기에 예산의 새로운 세거 성씨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예산 이거 성씨는 첫째, 고려 말~조선 초의 혼란한 틈에 이거하여 입향한 경우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윤후(尹候)[?~1418]가 고려가 망하자 홍성으로 내려왔으며 아들 대부터 예산에 정착하였다.
둘째, 사화를 피해 입향한 이거 성씨도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신숙서(申叔胥)[?~1546]가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면천으로 유배되었고 1450년경 인접한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로 이거하면서 입향하였다.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이항(李炕)[?~?]이 1519년 기묘사화를 피해 대술면 산정리에 입향하였다. 신천강씨(信川康氏)는 생원 강효엄(康孝嚴)[?~?]이 사화를 계기로 신암면 용궁리로 피난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셋째, 국가 전란 전후에 관리가 되어 활약하다가 예산에 머무르는가 하면, 처자를 인솔하고 예산으로 피난하여 이거 성씨가 된 경우이다.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산신씨(靈山辛氏)는 신후담(辛厚聃)[?~?]이 1473년(성종 4) 아산현감을 거쳐 충익부도사로 관직을 마치고 신암면 오산리에 입향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권빈(權璸)[?~?]이 1500년에 사간원사간, 홍문관전한으로 발탁되었으나 병이 들어 처가가 있는 운봉면 운곡리에 낙향하면서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창원황씨(昌原黃氏)는 1500년대에 황언원(黃彦源)[?~?]이 응봉면 입침리에 낙향하면서 부사공파(府師公派)를 형성하였다. 공산정씨(公山鄭氏)는 정응규(鄭應圭)[?~?]가 임진왜란 때 예산군 고덕면으로 입향하였다. 양주조씨(楊州趙氏)는 조충수(趙忠秀)[?~?]가 신양면에 입향하였으며, 아들인 조정(趙挺)[1551~1628] 대부터 일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넷째, 임진왜란 이후 이거한 성씨 가운데 기존 토착 사족들과 연계하여 점차 자신들의 터전을 넓혀 간 성씨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창녕성씨(昌寧成氏)는 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로 인해 정국이 혼란스럽자 성흔[?~?]이 벼슬을 버리고 대흥군 원동면 가좌울[현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로 낙향하였다. 가좌울은 성흔의 증조할아버지인 성희옹(成希雍)[1464~1526]의 부인 담양전씨(潭陽田氏)의 고향이다. 양천허씨(陽川許氏)는 허속(許速)[1674~1739]이 예산 신례원에서 수철리를 거쳐 원장복으로 입향하였다. 평양조씨(平壤趙氏)는 통어사를 지낸 조유(趙猷)[?~?]가 1600년대 예산에 입향하여 아들인 조세걸(趙世傑)[?~?]이 광시면 대리에 정착하였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집안으로 1700년대 김한신(金漢藎)[1720~1858]이 신암면 용궁리로 입향하였다. 한양조씨(漢陽趙氏)는 1800년대 초 조전오(趙全五)[1806~1864]가 수원김씨(水原金氏) 문중의 사위로 입향하여 대술면 장복리에 정착하였다.
2015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예산군에 거주하는 이거 성씨는 파평윤씨 1,556명, 평산신씨 1,503명, 연안이씨 254명, 신천강씨 124명, 영산신씨 171명, 안동권씨 798명, 창원황씨 748명, 공산정씨 131명, 양주조씨 202명, 창녕성씨 631명, 담양전씨 654명, 양천허씨 220명, 평양조씨 167명, 경주김씨 4,329명, 한양조씨 1,032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