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828
한자 鄭靖和
이칭/별칭 정묘희(鄭妙喜),수당(修堂)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시대 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최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연표보기 - 정정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정정화 김의한과 혼인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정정화 상하이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정정화 국내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
활동 시기/일시 1920~1929년 - 정정화 독립운동 자금 임정에 전달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정정화 가족들과 함께 자싱으로 피신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정정화 후난성 창사로 가서 임시정부에 다시 합류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정정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정정화 한국혁명여성동맹 조직 및 간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정정화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 주임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정정화 귀국
몰년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정정화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정정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포장 수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정정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출생지 정정화 출생지 - 서울특별시
활동지 정정화 활동지 - 중국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여성

[정의]

일제강점기 예산에 거주하였던 여성 독립운동가.

[개설]

정정화(鄭靖和)[1900~1991]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뒤 10여 년간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책 및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망명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이동녕(李東寧)과 김구(金九) 등 임정 요인 및 그 가족들을 돌보며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서 임정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으로 일하는 등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에는 친정아버지 정주영(鄭周永)이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어 예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가계]

정정화의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본명은 정묘희(鄭妙喜), 아호는 수당(修堂)이다. 아버지는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이고, 어머니는 이인화이다. 시아버지는 구한말 개화파 학자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이며 남편은 한국독립당 대표를 지낸 김의한(金毅漢)이다.

[활동 사항]

정정화는 1900년(고종 23)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0년 김가진의 셋째 아들 김의한과 혼인하였다. 1914년 매동(梅洞)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부터 중동(中東)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남편 김의한은 정정화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19년 3·1운동 후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정정화는 상하이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하고 1920년 1월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정정화는 당시 임정 법무총장으로 있던 신규식(申圭植)과 시아버지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0년 3월 초 국내로 잠입하였고, 신규식의 맏조카인 세브란스 산부인과 의사 신필호의 관사를 거점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섰다. 정정화는 20일가량 서울에 머무르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뒤 4월 초 상하이로 귀환하여 첫 번째 독립운동 자금 조달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어 1921년 봄 두 번째로 국내에 밀파되어 예산의 친정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여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이후 수차례 국내에 잠입해 은밀히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상하이로 나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손상되어 국내외 동포들의 재정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정정화는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1929년 7월 여섯 번째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고, 이후 1년 6개월간 국내에서 체류한 후 1931년 초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독립이 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상하이로 망명한 직후부터 주변 정세가 변화하였고 독립운동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931년 연이어 발생한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이 주된 요인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인적·물적 기반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일부 부일배(附日輩)들이 일제의 힘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중국의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31년 말 임정의 특무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이 조직되었고 김구가 단장을 맡았다. 1932년 1월과 4월 한인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한·중 양민 간의 갈등과 대립은 일거에 불식되었고, 항일투쟁의 연대 고리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정치적 망명객으로 취급하여 보호해 주던 프랑스 조계 당국의 태도를 변화시켜 프랑스 조계 당국은 한국 독립운동자들에게 즉시 상하이를 탈출하라고 통고하였다.

1932년 5월 1일 정정화의 가족은 상하이를 떠나 자싱[嘉興]으로 피신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성장을 지낸 임긍(林兢)의 주선으로 남편 김의한이 전원공서에 취직하여 1934년 봄 임지인 장시성 펑청현[豊城縣]에 도착한 정정화 일가는 1년쯤 있다가 우닝현[武寧縣]으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정정화는 1935년 11월 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가담하였다.

1938년 2월 정정화의 가족은 장시성 우닝을 떠나 후난성 창사로 가서 임시정부와 다시 합류하였고,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와 구이저우성[貴州省] 구이양[贵阳]을 거쳐 쓰촨성 남쪽 끝에 있는 치장현에 도착한 1939년 4월 말에 이르러서도 정정화의 임시정부 안주인 역할은 계속되었다.

한편, 충칭[重慶]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조직과 체제를 확대·강화하면서 독립운동의 활동 기반을 갖추어 갔다. 1940년 5월 민족진영의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9월에는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1940년 10월에는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단일 지도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제고되었다. 이때 정정화 또한 남편 김의한과 더불어 한국독립당의 창립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의 여성 조직으로 한국여성동맹이 치장현에서 창립될 때, 정정화는 간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1940년 9월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각 정파의 부인들 또한 충칭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다. 여성 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정정화는 훈련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정정화가 집행부의 일원을 맡은 재건한국애국부인회는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 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갔다. 아울러 연합군 측으로부터 인계받은 동포 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 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한 후 임정 요인들은 11월 5일 충칭을 출발하여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환국하였지만 정정화는 임정 요인들이 충칭을 떠난 뒤에도 투차오[土橋]에 남아 한 달 동안 뒤처리를 마치고 상하이를 거쳐 미군 수송선을 타고 1946년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환국 이후 정정화는 일체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편이 납북되고 자신도 부역의 누명을 쓰고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91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정정화는 회고록 『녹두꽃』을 남겼다. 『녹두꽃』은 『장강일기』로 개정되어 1987년 발간되었다.

[묘소]

정정화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정화의 공적을 기려 1982년 대통령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정정화의 삶은 「치마」라는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극단 독립에서 공연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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