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
1950년대 용인 지역의 역사, 지리, 정치 교육 등을 수록한 읍지 성격의 책자. 용인군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의 역사, 문화, 지리 등를 수록한 책으로 용인군에 관한 종합적인 기록의 효시가 되는 책이다. 1957년 태성고등학교 교사 국중일이 용인 지역 역사에 대한 『용인사』를 출간하였고, 이어서 용인교육구[현 교육지원청]에서 사진첩인 『용인대관 1957년간』을 출간하였다...
-
조선 후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 있었던 시장. 개천장은 양지와 이천의 경계에 위치했던 장시이다. 개천장은 설시(設市)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신설되었다가, 경기도 이천 오천장의 설시와 함께 이설·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개시일은 4일과 9일의 5일장이었다. 개천장에서 거래되었던 물품은 쌀·면포·마포·과일·어염·연초 등이었다....
-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 구역. 언제 설치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려 이래 조선 초기까지 특수한 행정 단위의 하나로 기능했다. 일반적으로 군현으로 삼아 운영하기에 인구와 토지가 적은 곳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 『태종실록(太宗實錄)』권28에, "용구(龍駒)와 처인(處仁)을 병합하여 용인(龍仁)으로 하고 광주(廣州) 임내인 주계(朱溪)·고...
-
1637년 경기도 용인 광교산에서 벌어진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 1637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1636년 12월 1일,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후 인조는 1만 3,000여 명의 군사로 남한산성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
-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교육 기관, 시설 및 관련 시책. 용인 지역에서 교육은 오래전부터 어떤 형태로든 실시가 되었지만 기록에 전하는 것은 조선시대 이후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적 교육기관인 향교나 재지 사족들이 선현의 제향을 위해 세운 서원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용인 지역에는 포은 정몽주 등 많은 선현의 유택이 있다. 따라서 그 학덕을 따르기 위해 이주...
-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주요 도로, 교통 수단 및 관련 시설. 용인시의 교통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철도와 자동차가 중심이었으나 현재는 자동차 교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주요 교통기관은 자가용과 버스이다. 버스는 공용버스·일반버스·직행버스·마을버스·시외버스 등이 있다. 버스 노선을 보면 2008년 11월 현재 국비공영버스가 3개노선, 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부아산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경안천으로 흘러드는 하천. 금학천은 용인시 내 한복판을 흐르는 경안천의 지천으로 하천 연장은 5.1㎞, 유로 연장은 5.5㎞, 유역 면적은 14.3㎢, 몽리 면적은 5㏊이며, 호안은 6.2㎞의 하천이다. 발원지는 크게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북쪽의 멱조고개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세천이고 다른 하나는...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명화는 용인군 모현면 부계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을 무렵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장옥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를 주무대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항일 유격...
-
양우량을 시조로 하고 양구주를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남원양씨의 원래 시조는 본래 탐라국 개국 신화의 삼신인 중의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 757년(경덕왕 16) 양우량이 왕실에 큰 공을 세워 남원부 남원백에 봉을 받아 남원을 관적으로 하여 시조가 됨으로써 양씨는 제주와 남원 두 관적으로 나뉘었고 후에 충주가 분관되어 세 관적이 있게...
-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 구역. 언제 설치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려 이래 조선 초기까지 특수한 행정단위의 하나로 기능했다. 일반적으로 군현으로 삼아 운영하기에는 인구와 토지가 적은 곳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양지현(陽智縣)조에 “본래 수주(水州)에 속한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인데, 본조(本朝:조선)...
-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사람이나 차들이 다니는 비교적 큰 길. 경기도의 남부 중심부에 위치한 용인시는 북쪽에 성남시와 광주시, 동쪽에 이천시, 남쪽에 안성시와 평택시, 서쪽에 화성시, 수원시, 의왕시와 접해 있어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한 도로망을 가지고 있다. 용인시를 지나는 도로는 남북을 지나는 경부고속국도와 동서를 관통하는 영동고속국도, 남북을 지나...
-
오일장은 전국 각지에서 닷새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재래시장을 말한다. 용인 지역 역시 산업화로 인해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기 이전, 즉 전통적 농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1960년대 말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장이 서고 있었다.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였던 용인장(김량장)을 비롯하여 백암장, 원삼장, 송전장, 모현장 등은 용인 지역의 대표급 재래시장이었다. 2009년 말 현재...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이거나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용인의 독립운동가는 의병부대 및 항일 무장단체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 밖에도 언론·외교 활동을 통해 국권 피탈의 상황을 국내외에 알려 독립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 우선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면, 용인 지역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약한 임옥여·정...
-
조선 전기 용인에서 남편을 살해한 여인. 만장은 조선 전기의 여인으로, 양지 사람인 선군(船軍) 정귀생(丁貴生)의 처이다. 1430년(세종 12) 평소 사통하던 선군 이흥(李興)과 공모하여 남편을 살해하였다. 뒤에 붙잡혀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정부 이흥은 참형되었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목악과 신기리를 합쳐 한 글자씩 따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양지현에 속했던 지역이다. 이전에는 죽주에 속했던 목악부곡이 있었던 곳인데 1413년[태종 13]에 죽주에서 양지로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목악리, 신기리와 후동을 합쳐 목신리라고 하였다. 동쪽에는 구봉산[455m]이...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속하는 법정리. 미평리는 미륵뜰, 즉 ‘미륵이 있는 들판’을 한자로 옮긴 이름이다. 마을 한가운데 석조불상[약사여래불]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를 미륵으로 부르고 한자로 옮겨 미평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미평리의 미륵(약사여래불)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때 절이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미 마을이 있었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미평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미평리사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900년대 초에 작성된 『사탑고적고』로, “석불입상은 그 분지에 매몰되어 있는데 지상에 노출된 높이는 12척 5촌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절의 명칭이나 폐사 시기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 명확하지는 않지만 석불이 잔존하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평지형 사찰이...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속하는 법정리. 박곡리는 본래 양지군 박곡면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박곡은 바깥쪽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보인다. 즉 본래는 밭골이나 밧골로 불리던 것이 박골로 변화되고 한자로 옮기면서 박곡(朴谷)으로 표기된 것이다. 박석리는 본래 죽주(竹州)에 속했던 지역으로 원래는 대곡부곡(大谷部曲)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측...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 절터. 양지에서 국도 17호선으로 백암을 지나가다 원대에서 동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가면 박곡리에 이른다. 절터는 마을 동편 대덕산 서쪽 사면에 해당하는 오방낭골의 구릉 평지에 있다. 2011년 현재 주민들이 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고적총람(古蹟總覽)』·『사탑...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백봉리사지에는 3층석탑과 석불 및 주초석 등이 남아 있었으나 석탑 등은 1983년에 대은사가 창건되면서 옮겨졌다. 현재 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과수원은 삭토되어 건물이 들어서 있고, 주변 단애 면에서 고려시대의 기와편과 자기편이 깨어진 채 발견되었다. 사지의 중심부와 그 주변이 암반층까지 깎여 본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창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기본이 바르고 미래핵심역량을 갖춘 홍익인재 육성을 교육의 기본 방향으로 하고 있다. 교육목표는 기본과 원칙을 지키며 더불어 사는 어린이(德), 꿈을 키우며 시간을 관리하는 자율적인 어린이(自), 창의적 지성을 갖춘 슬기로운 어린이(創), 활기차고 부지런하며 건강한 어린이(體) 육성이다. 용인시에서 양지...
-
조선 중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청나라 군대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 1627년(인조 5) 후금(後金)[뒤의 청나라]의 1차 침입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친 후금은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조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해왔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축 산성. 보개산성은 경안천과 신갈천의 분수령을 이루는 보개산 정상부에 위치한 산성이다. 성내 시설물로는 성문과 건물지 등이 확인된다. 성문은 동문지, 남문지와 암문(暗門)의 성격을 가진 남벽 서측의 문지 등 세 곳이지만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은 문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내에서는 주로 도기편과 자...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독조봉 동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여주군 흥천면 복대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복하천의 발원지가 되고 있는 용인시 양지면은 남북고동서저(南北高東西低) 지형 형태에다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성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를 동·서류하는 하천들에 의해서 하곡지가 발달되어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유명한 “이천쌀...
-
전통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된 방어 시설. 용인은 조선시대의 용인현을 계승한 지명으로 고려시대에는 용구현과 처인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중 용구현은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구성현 혹은 멸오(滅烏)라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 때 거서(巨黍)로 고쳐졌다가 고려 초에 용인으로 바뀌었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고구려가 구성현을 차지하...
-
경기도 용인시에서 이루어지는 화재의 진압 및 예방과 관련되는 활동. 소방은 기본적으로 화재를 예방·경계하고 진압하는 일로 정의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재뿐만 아니라 수해, 지진 등의 재해나 그 밖의 위급한 상황에서 그 피해를 경감시키는 활동이나 구조·구급 활동을 통하여 국민의 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는 일로 보다 넓게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고...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송교원은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정주원 의병부대는 임옥여 의병부대·이익삼 의병부대와 함께 2차 용인의병운동(1904~1909)을 이끈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죽산·양지 외에 수원·안성·당진·면천·풍도·서산까지 넓은 활동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주원 의병부대의 활동은 크게 일본군과의 교전을 통한 대일 항쟁과 이를 뒷받...
-
일제 강점기 용인에서 활동한 친일파 함경남도 장진 출신이다. 구한말 양지현감으로 부임하여 용인과 인연을 맺었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제암(濟庵). 아버지는 율학훈도 송문수(宋文洙)이며, 아들은 송종헌(宋鍾憲)이고, 손자는 송재구(宋在九)이다. 송종헌은 송병준 사후 백작의 작위를 이었고 양지면장을 지냈으며, 손자도 양지면장을 지냈다. 함경남도 장진(長津)...
-
1931년부터 1972년까지 운행된, 경부선 수원역을 기점으로 용인을 지나 이천·여주에 이르는 증기 및 가솔린 병용 철도. 연장 73.4㎞, 궤간 0.762m의 증기 및 가솔린 병용 철도로, 수려선철도의 노선은 수원-동수원-원천-덕곡-신갈-어정-삼가-용인-마평-양지-제일-추계-오천-표교-유산-이천-무촌-죽랑-매류-신대-여주이다. 총 운행 시간은 2시간 23분이며, 1938년 당시...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과 양지면 주북리 사이에 있는 도로. 시점은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둔전리이며, 종점은 양지면 주북리 박성마을 앞까지이다. 양지읍 서북 지역과 남서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이다. 시군도 10호선은 둔전~양지길이라고도 한다.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주민들이 양지로 갈 경우 마평동으로 우회해야 했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구간...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안춘경은 정주원 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의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경기도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조직이 확대되어 9...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양지면의 소재지로 과거 양지현의 관아(官衙)가 있던 곳이다. 양지는 양지현(陽智縣)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양지는 본래 수주(水州)에 속해 있던 양랑촌부곡으로 1399년(정종 1)에 이를 고쳐서 현이 되면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양지현의 관아가 있던 지역으로, 양지현이 군으로 승격되었을 때 군청이 있던 곳...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산포지. 양지리 유물산포지는 모두 다섯 곳에 분포하는데, 각각을 양지리 유물산포지1에서 양지리 유물산포지5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양지리 유물산포지는 용인과 이천을 잇는 국도 43호선에 자리한 양지읍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유물산포지1은 진흥 6차맨션아파트 주변이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속하는 행정면. 4개 면을 합하였다는 뜻으로 내사면이 되었다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양지라는 고유지명으로 변경되었다. 본래 양지군 지역으로서 양지 읍내가 되므로 읍내면이라 하여 교동·암곡·서촌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주동면의 삼매·공세·평촌 등 7개 리와 주북면의 정수·대대·계장 등 6개 리, 주서면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에 있는 양지면 관할 행정 기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1읍 4동 6면 중 양지면 주민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행정 업무를 최 일선에서 담당하고 있는 기관이다. 양지면의 행정, 민원 및 주민의 복리 증진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기존의 양...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어두니고개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유림동에서 경안천으로 흘러드는 하천. 양지천의 물줄기는 크게 세 곳에서 흘러나온다. 양지면 남곡리 어두니고개[446.8m]와 양지리 구렁고개 및 기남이고개 옆 363.2m 고지에서 발원하는 세 곳의 물줄기가 월곡에서 합류하여, 동류하면서 송문리, 유림동 고진에서 경안천에 유입된다....
-
1532년(중종 27) 김안국이 지은 양지현 동헌 중수 기문(記文). 『모재집(慕齋集)』에 전하는 작품으로, 권렴(權㻩)이 양지현(陽智縣)의 동헌(東軒)을 중수하고, 김안국(金安國)[1478~1543]에게 부탁하여 받은 기문이다. “양지는 작은 고을이다. 경기 안에 예속되어 공물이 많고 부역의 번거로움이 다른 도의 배나 된다. 땅이 좁고 사람이 적으며, 아전과 노비들은...
-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용인시의 역사. 용인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이래의 변화를 거쳐 1413년(태종 13)에 등장했다. 오늘날 용인시의 영역이 형성된 것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용인군과 양지군, 죽산군의 일부가 통합됨으로써 그 모태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은 지역 내외의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 오는 가운데 형성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오경수(吳敬秀)이다. 오인수는 18세부터 포수들이 모여 솜씨를 자랑하는 화포계(火砲契)에 참여하여 늘 1등을 차지하는 등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안성(安城)·죽산(竹山)·양지(陽智)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경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의병장 정철화(...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용인시청에서 98호선을 따라 양지 방향으로 가다가 고림교를 지나면 숲원이마을이 있다. 지석묘는 이 곳의 백산수목원 안에 자리한 김해허씨 묘역에 위치한다. 주변 지세를 보면 고인돌은 주북천과 대대천이 합류하는 충적 대지의 편평한 평지에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295㎝, 너비 250㎝, 두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 있는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 공용 터미널. 용인시에는 에버랜드를 비롯한 한국민속촌 등 관광 레저 시설과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캠퍼스, 명지대학교, 용인대학교 등 교육 시설이 밀집되어 있어, 수도권과의 교통 접근성을 구축하고 있으며, 지방권 이용객의 유입을 위해 서해안권과 영동권, 영남권, 충청권으로 연결되는 교통편이 많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관곡로에 있는 용인시 관할 치안 행정 기관. 법의 집행 및 범죄 수사를 통해 용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생명과 재산보호 등 시민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1945년 10월 21일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개서하였으며, 이우종 초대 서장이 취임하였다. 1968년 12월 23일 김량장동 180번지에서 89번지로 청사를 이전하였다....
-
경기도 용인 지역에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성씨.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기 위하여 붙이는 일종의 칭호로서, 아버지와 자식 간에 대대로 계승되며 절대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고려 중기부터라고 하는데, 시대에 따라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성에는 본관(本貫)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관(...
-
오늘날 용인은 첨단 산업의 중심지로 불린다. 삼성전자를 비롯하여 전자와 전기, 자동차, 원자력 등등, 모든 분야의 첨단 산업 시설과 연구소, 연수원 등이 용인 지역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하고, 산업 시설과 연구단지가 서울을 비롯한 인근 시군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입지에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0년대 이후 수지구와 기흥구를 중심으로 급속...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은혜 갚은 구렁이 이야기. 뱀실, 또는 배매실은 용인시 처인구 내사면 남곡리 용곡마을의 속명이다. 1984년 5월 10일에 김량장동에 사는 정양화가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1985년에 출간한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하였다. 옛날에 착하고 선량한 선비가 살았는데, 불쌍한 사람만 보면 자기 일보다 더 성실하게...
-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조직했던 자위군. 의병이란 나라 안에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民軍)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의병들의...
-
조선 말기 경기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진. 경기도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면서 8월에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주로 유격전으로 일제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밖에 일진회 등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빈민을...
-
경기도 용인시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지리적 요소. 용인은 경기도의 남부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로, 극동은 백암면 고안리, 극서는 수지구 고기동, 극남은 남사면 원암리, 극북은 수지구 고기동이다. 용인은 서울에서 동남 쪽으로 30㎞ 떨어진 도시로 행정구역상 동쪽은 이천시와, 서쪽은 수원·의왕·화성시와 접하고 남쪽은 안성시, 북쪽은 성남 및 광주시와 접하고 있다....
-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기도 용인의 역사. 경기도 용인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과 같은 반일 민족 운동이나 소년 운동, 청년 운동 등과 같은 반봉건적 근대화...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에 있는 구한말 의병장 임경재를 기리는 동상. 농상공부 주서였던 임경재는 스러져가는 정국을 개탄하며 1907(순종 1) 7월에 이천군 신면 이근풍(李根豊)의 집에서 주창용, 신규희, 조상현 등과 의병으로 나설 것을 결의하고 의병대를 편제하였다. 좌익장이 된 임경재는 용인, 이천, 광주,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임진산성은 원래 임진산의 정상, 곧 수지구 풍덕천동 산 37번지와 기흥구 보정동 산 82-2번지 일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임진산성지·풍덕천동성지·예진산성지 등으로도 불리는 임진산성은 조선 중기와 후기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성이기도 한데...
-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동했던 천주교 신부 압고지는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에 속해있는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현재는 에버랜드가 인근에 있어 이름난 곳이다. 압고지는 용인에서 최초로 천주교 본당이 설립된 곳으로 경기도 내에서는 왕림본당, 미리내본당에 이어 세 번째 본당이 설립되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후에 양지에 본당이 생기면서 압고지본당은 폐지되었으며 정규량, 안학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이름은 정수산 아래 위치해 정수 또는 증세라고 하였으며, 또한 예로부터 물이 맑다하여 정수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제주고씨가 처음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선내골에 주민들이 23호 정도 밀집되어 있고 가장 처음 정착한 곳이다. 본래 양지현 주북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정주원(鄭周源)[1870~1908]은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사람이다. 그는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8월에 떨쳐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였다. 정주원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정주원은 190...
-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시켰으며, 5월 말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05년 들어 일본은 청과의 봉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화시켜 11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예전에 여주 영릉 참배길에 나선 어가가 지날 때 비가 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날이 활짝 개었다고 하여 개일 ‘제(霽)’자와 날 ‘일(日)’자를 붙여 제일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150여 년 전까지 이곳에 개천장(介川場)이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개’는 음을 따고, ‘천’은 내(나리)에서 온 것으로 추측해 볼...
-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 구역. 제촌부곡은 언제 설치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려 이래 조선 초기까지 특수한 행정단위의 하나로 기능했다. 일반적으로 부곡은 군현으로 삼아 운영하기에는 인구와 토지가 적은 곳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양지현(陽智縣) 조에 “본래 수주(水州)에 속한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인데,...
-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경기도 용인 지역의 역사. 1413년(태종 13)에 용구현과 처인현을 병합해 만들어진 용인현은 수원진영(水原鎭營)에 소속되었으며 남양부(南陽府)에서 관할하였다. 수원진에 부속된 시기에는 16개 면을 종5품의 현령이 다스렸으며, 훈도(訓導) 1명을 두었다. 1872년(고종 9)에 작성된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걸로 보아 이와 같은...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조성습은 제2차 용인의병(1904~1909)을 이끈 정주원 의병부대 소속이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에 있는 공공보건 의료기관. 시민 보건사업, 예방접종, 진료 및 검사와 각종 건강 정보를 제공하여 지역 시민의 삶의 질 향상 및 건강한 지역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65년 4월 15일 터미널 인근에 용인군 보건소가 설립되었다. 이후 용인군 보건소에서 각 지역의 보건진료소를 설치하였다. 1996년 3월 용인군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 문수봉 동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안성시 일죽면과 이천시 장호원읍을 거쳐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남한강의 한 지류인 청미천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 독조봉 건지산[410.4m]과 사암리 문수봉 및 어두니고개[446.8m] 산록에서 발원하는 10여 개의 지천들을 합류하여 일단 원삼면 사암리의 용담...
-
추엽을 시조로 하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고려 인종 때 송나라에서 건너온 성씨로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한 추엽이 시조가 되었다. 본관은 개성·강화·파평 등이 문헌에 있으나 오늘날에는 추계추씨와 전주추씨 두 본으로 되어 있다. 추엽의 아들인 추황(秋簧)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명심보감』의 편자로 알려져...
-
경기도 용인을 관적으로 하는 성씨. 우리나라 성씨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 할 수 있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15세기에 존재한 전국의 성씨 종류와 본관의 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용구현 토성으로 진(秦)·이(李)·송(宋)·용(龍)·엄(嚴) 등 5개와 처인현 토성 이(李)·서(徐)·지(池)·섭(葉)·김(金)·강(康) 등 6개를 나열하고 있다. 또 양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 양지에서 백암 방향으로 가는 국도 17호선에서 평창리로 진입하는 도로가 분기되는데, 분기점에는 대규모의 전원주택 단지가 위치해 있다. 평창리 유물산포지는 이 전원주택 단지(1998년 서울대학교와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구석기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짐)가 조성된 구릉 전 지역이다. 조사 당시...
-
임온을 시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풍천임씨(豊川任氏)의 시조는 본래 중국 소흥부 자계현 사람으로 고려 때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오른 임온(任溫)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임온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풍천에 적을 둔 것으로 전하는데, 이로 인하여 후손들은 풍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한순팔은 용인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인 정주원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출생과 경력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순팔이 가담한 정주원 의병부대가 서용범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양지·양성에서 또한 150명을 인솔한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