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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030
한자 獨立運動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서승갑

[정의]

조선 후기 외세의 침투에 대항하여 국권을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으로부터 일제강점 후 주권을 되찾고자 벌였던 일련의 반외세, 반봉건을 지향한 운동가

[개관]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주의운동은 대내적으로 반봉건적인 모순을 제거하는 동시에 제국주의 외압으로부터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근대 민족주의운동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은 선각적인 지식인, 신진관료, 상공업 자본가들이로 이루어진 민족주의운동세력이었다. 제국주의 침탈에 대응하여 성남인들은 일본과 결탁한 봉건적 지주, 예속 자본가에 대항하여 민족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다른 하나의 축은 반봉건과 반제국주의 기치 하에 일어선 민중이었다. 민중들의 혁명이념은 동학농민전쟁, 활빈당 등의 농민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나아가 위정척사 사상을 구현한 의병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직접 착취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이 의병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실천적 독립운동가인 한순회이명하 등의 역정에서 나타난 독립 의지가 성남지역의 전반적인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펼쳐진 민족주의운동은 성장과 분화 과정을 반복하며 민족해방운동으로 변모한다.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지식인 중심의 간접적인 투쟁 형태인 계몽운동과 직접 무장투쟁을 표방한 의병전쟁으로 전개되었다. 계몽운동은 세계 시장으로의 편입을 계기로 만연한 진화론적 제국주의 논리에 비판적인 대응 방안을 구축하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반면 직접 무장투쟁론은 근왕적인 유교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일차적 과제와 의병 구성원들이 요구하는 계급모순의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차적 과제 사이에서 민족 역량을 최대화하지 못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의병운동]

성남지역에서 전개된 의병전쟁은 반외세(反外勢), 반봉건(反封建)을 요구하는 직접 투쟁이었다. 일본인 농장주와 일진회원을 직접 응징하거나 친일관료를 처단하는 것은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구현한 것이다. 의병전쟁은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려는 민족주의운동의 한 방법이었으나 또다른 노선인 계몽운동과 연계되지 못하고 분산적인 형태로 전개된 것이 한계였다. 그러나 그 강도에 있어서는 남한산성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치열한 전투로 이어졌다.

1878년 4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서 출생한 남상목은 이강년 의병대에 합류하여 참모관을 역임했다. 음성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나 후에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사하였다.

1876년 광주군 대왕면에서 출생한 윤치장은 퇴역병 출신으로 광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다 의병에 참여했다. 1907년 11월 중군장 오사과(吳司果) 등 부하 70명과 함께 광주, 과천에서 활동하였다.

성남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의병운동과 독립군에서 활약한 이명하(李命夏)라 할 수 있다. 이명하는 1878년 광주 대왕면에서 출생하였으며 1902년 지방 관리직에 나아가 제천군주사에 종사하다가 의병에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유인석 의병장 수하의 소모장으로 활동하던 중 단양 영춘군수를 참살하였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후 1919년에 상경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0월 만주로 건너갔다. 대한독립단 제3중대원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2월 중국 삼도구(三道溝)에서 순사부장(巡査部長) 등을 사살하였다. 이명하는 의병전쟁에 참여했던 직접 무장투쟁론자들이 독립군으로 전환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한 일면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1919년 3.1운동은 잠재된 의병정신이 폭발적인 위력을 과시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성남지역의 3.1운동은 3월 하순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으며 횃불 시위운동은 4월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경기도의 경우 일제 경찰력과 무력충돌이 70회 정도였으며 살해자는 104명, 부상자 190여 명, 체포자가 약 1,350명을 상회한다는 수치를 감안하면 이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돌마면 율리한순회(韓順會), 한백봉(韓百鳳)은 1919년 고종 장례식에 참여한 후 3.1운동을 직접 주도하였다. 이들은 면내의 유지들과 접촉하면서 시위운동을 모의하는 한편 낙생면 초대면장 남태희(南台熙)와도 연계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다. 특히 한순회가 천도교 광주교구장이었던 점과 면장을 지낸 남태희 등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농촌의 지식인층이 시위운동에 적극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대왕면의 독립운동은 중대면 송파리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이 이 지역에 파급되면서 시발되었다. 광주군 돌마면 여수리가 본적인 이시종(李時鍾)은 농사에 종사하던 중 송파시위에 참가한 후 대왕면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변천]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후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직접무장투쟁은 소강기를 맞는다. 계몽운동이 우위를 점하면서 장기적으로 관망하는 형세가 되었지만 국권 회복에의 의지는 일제 무단통치에 굴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성남지역에서 진행된 민족해방운동은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 방략을 전환함에 따라 실력양성운동과 비밀결사운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실력양성운동]

성남지역의 신지식층들은 구사상과 구관습에 대한 개혁론을 제기하여 시민 정신의 함양에 치중하였다. 즉 이런 개혁론은 산업과 교육의 진흥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적, 사회적 여건의 조성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성남지역에서 실력양성운동의 일단을 살펴 볼 수 있는 단초가 해공 신익희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자강운동을 직접 시현한 대표적인 인물은 광주 대왕면 출신인 이석종으로 제국주의 침탈의 위험성을 직시하여 국권침탈조약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애국계몽운동을 실천하였다.

[비밀결사운동]

신간회 광주지회의 조직과 활동은 민족협동전선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성남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의 일단을 드러낸다. 민족협동전선의 흐름에 따라 돌마면의 독립지사 한순회 등이 신간회 지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광주지회장에 한순회가 선임되고 간사로 한백봉(韓百鳳), 한백호(韓百鎬), 이대헌(李大憲), 유인목(兪仁穆), 박기환(朴基煥), 한용회(韓龍會) 등이 피임되는 등 돌마지역 인사들이 조직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한순회천도교에 귀의한 후 천도교 광주교구장을 거쳐 중앙총부 중앙위원과 봉도까지 역임하였다. 전국 순회 강연에 참여하여 독립정신을 앙양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달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1930년대 조직 노선의 변화와 대중운동을 지도하려는 전국적인 경향은 성남에서도 나타난다. 1934년 조직 개편된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단체의 전신은 1930년에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근거하여 석혜환, 정영신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노동운동단체 남한산노동공조회(南漢山勞動共組會)였다.

남한산노동공조회는 노동자, 농민, 상인 등을 망라한 조직으로서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야학을 설립하는 한편 강연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한 등 노동계급의 의식을 확대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34년 12월 남한산노동공조회는 광주공산당협의회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강화하였다. 석혜환(石惠煥), 정영신(鄭榮信), 구상회(具想會), 구본흥(具本興), 김흥종(金興鍾), 구용홍(具溶弘), 정영배(鄭永培), 이양식(李良軾), 구희서(具喜書), 선진수(宣鎭秀), 강달영(姜達榮), 이순응(李順應), 김귀용(金貴用) 등이 세포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934년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차원에서 조직 강화된 인천적색노동조합과 연계 투쟁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 지역은 자료가 불분명하지만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정리위원회와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광주공산당협의회가 경기도 지역의 사회주의 세포 조직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사건에 관련된 인물로 산성리 출신의 석재홍추완호가 있다. 이들은 프로레타리아 연극을 통해 사유재산 제도의 부정과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하는 이동식 소형극장이라는 이동극단 형태의 결사체를 조직하여. 연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는 대중에게 계급의식을 확산시키려는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의병정신의 투지를 계승하고 무장투쟁론을 실천에 옮긴 인물은 광주군 중대면 출신인 염재항이다. 염재항은 광복군 제 2지대에 입대하여 초모를 위한 공작 활동을 수행하는 한편 적에 대한 정보수집, 유격전 등 항일 활동을 펼쳤다.

[의의]

성남지역에서 민족 해방을 쟁취하려는 의지는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운동의 전개양상과 조응하여 발휘되었다. 민족해방운동의 태동기와 고양기에 전개된 운동은 절박한 상황에서 분산과 결집을 반복하면서 활발하게 지속되었다.

성남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우파에 의한 ‘선 실력양성 후 독립론’에서부터 적색노동조합의 사회주의 운동에까지 다양한 노선을 보여준다. 식민지 구조적 모순에 대항하여 민족 정통성을 고수하는 한편 생존권을 확보하려는 이 지역의 투쟁은 일제의 가혹한 착취와 탄압에서도 이어 온 것이어서 의미를 지닌다.

성남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반침략과 반봉건운동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 반제국주의 투쟁에 성남지역의 투쟁 역량을 집결시켜 성남인의 저력을 과시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7.26 활동사항 수정 대한독립단 제3중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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