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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3223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Samil Undong|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만세운동,독립만세운동,기미독립운동,기미년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윤종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1 만세 운동 일어남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26일 - 한백봉, 한순회·유창석 등과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율리에서 만세 시위 시작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27일 - 광주군 돌마면 분당리 장터와 낙생면에서 만세 시위 계속됨
발생|시작 장소 만세고개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한백봉|이준구|남태희|한순회|유창석|김교상

[정의]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대한 독립을 목적으로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

[개설]

3·1운동 은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을 목적으로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만세 시위로서, 경기도 광주군 일대[현 성남 지역 포함]에서는 4월까지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7년(순종 1)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간섭까지 하였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무단통치(武斷統治) 혹은 헌병경찰통치를 실시하여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압박하였다. 1907년 6월 고종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는데, 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후 건강에 별 문제가 없던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갑자기 서거하면서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해외에서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하였다. 서울에서 열린 고종황제의 장례식에는 광주[성남] 지역 유지들도 참석하게 되었고, 이들은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을 목격하였다.

[경과]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자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지역에서는 돌마면장 이준구와 낙생면장 남태희가 즉시 사직서를 내고 대문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 만세 시위를 지도하였다. 3월 26일 돌마면 율리한백봉한순회, 유창석 등과 비밀리에 구한국 국기를 제작한 후 지금의 국군수도병원 뒷산인 만세고개 위에 올라가 봉홧불을 올리면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3월 27일은 분당리 장날이었다. 분당 장터에는 시위 군중 1,000여 명이 집결하였으며, 낙생면사무소로 몰려가 낙생 면민들과 합동 시위를 벌였다. 돌마면과 낙생 면민이 합세하자 시위 군중은 3,000여 명에 달하였다. 광주군 중부면[현 성남시 수정구중원구] 주민 300여 명도 중부면사무소가 있던 남한산성 안으로 몰려가 면장에게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으나 면장이 거부하자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기절시켰다. 이에 일본 헌병이 총을 쏘아 군중을 해산시켰다. 처음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는 일본인 순사도 이에 동조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했으며, 그의 부인도 동조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순회는 천도교 광주교구장으로서 성미(誠米)를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였으며, 숯골김교상은 만세 시위 이후에도 독립에 관한 각종 인쇄물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이렇듯 경기도 광주 일대의 만세 시위는 치밀하게 준비되었으며, 봉홧불을 신호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어서 일본 측을 당황하게 하였으며, 장날 군중이 많이 모이는 날에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결과]

성남 지역에서는 1919년 4월까지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이 만세 시위의 주동자로 같은 해 3월 29일 한백봉이 체포되어 1920년 4월 28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3·1운동 은 성남 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 세계 각지의 한인 사회에서 일어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무단통치는 문화통치로 전환되었으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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