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184
한자 盆唐區藪內洞地域-誌-衣生活
지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이연복]

연령별, 계절별 의복을 회상하면 해방될 무렵 초등학교 1, 2학년 다닐 때는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등교하였다. 6·25전쟁 이후부터 아이들의 바지, 저고리가 사라진 것 같다. 광복 후 초등학교 5, 6학년 때는 단추 달린 학생복을 입었다. 그 당시는 옷장수가 집집마다 방문하여 외상으로 옷을 팔았다. 농촌인 관계로 남자어른들은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니고, 여름에는 중의적삼에 통바지 같은 것을 입었으며, 여자들은 치마, 저고리인데, 6·25전쟁을 계기로 남녀의 옷의 차이가 줄어들었다. 6·25전쟁 때는 일반인은 물론 대학생 교복도 염색한 군복이었다.

그 당시 노동하다가 외출할 때에는 현재처럼 양복으로 갈아입는 등 의생활이 많이 바뀐 것은 6·25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출생할 때의 유아복은 대개 끈이 달린 흰 배냇저고리를 해 입혔다. 우리나라 사람이 흰옷을 좋아했다는 설도 있지만 염색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1950년대에 대통령후보 신익희 선생의 한강백사장 연설 때 백사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하얀 것을 보면 흰옷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일날은 새옷을 해 입히지 않고 입던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입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제 때 운동화가 나오면 선생님이 반장에게만 하나 주었으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눈이 왔을 때 돌마국민학교에서 집에까지 4㎞ 정도 되는데 게다를 신고 올 수가 없어서 게다를 들고 뛰어온 기억이 있다.

할머니 회갑 때는 해방 직후인데, 농악대가 와서 놀고, 친척들이 많이 와서 밤새도록 앞마당에서 놀았으며, 옷을 특별히 해 입은 것 같지는 않고, 치마, 저고리를 곱게 입으셨다. 논에 모를 낼 때는 두레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였고, 탄천에서 천렵을 하면 마을 잔치로 큰 솥을 몇 개 걸어놓고 남자 여자가 하루를 즐겁게 지냈는데, 6·25전쟁 이후에 사라졌다.

전통 혼례식을 보았는데 신랑이 가마를 타고 오거나 말을 타고 왔다. 결혼식날 신랑을 다루었데, 그 방법은 화장실에 가서 재를 가져다가 뭉쳐가지고 가마 문을 열고서 신랑에게 뿌려서 신랑을 시험하였다.

장례식 때는 유교식으로 두건을 쓰고, 상장 막대기를 짚었다. 매장 때는 산소를 만들고 관을 메고 와서 관을 버리고 묻는 탈장을 하였다. 시제는 음력 시월달에 지냈는데, 제사지내면 떡이랑 과일을 많이 괴었다가 자손 관계되는 분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다. 본인과 사촌하고 수십 집을 떡 한 조각, 과일 조각을 나눠 주는 반기를 하였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손으로 빨래를 하였고, 옷은 장롱에다 그대로 걸어 놓아 보관하였다. 어렸을 때 옷은 바지, 저고리인데 어머니들이 만들어 주었고, 사다가 입지는 않았다.

[이상구]

일제 때는 주로 무명옷에 물감을 들여 입었다. 인상에 남는 것은 본인이 3남이어서 항상 형들의 옷을 물려받아 입었는데, 8세 때 천자문을 6개월만에 뗀 후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모친이 무명 한복을 한 벌 해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여름에는 어른들은 베로 만든 등걸 잠뱅이를 입었고, 겨울에는 내복 없이 솜옷에 무명 장갑, 버선에 짚신을 신고 다녔다. 일제 때 국민학교를 등교하려면 마을에서 내가 나팔을 불어 집결한 뒤 줄을 서서 10리 정도 떨어진 돌마국민학교를 다녔다.

일제 때는 성냥이 없어서 관솔을 사용하고, 마른 쑥으로 불씨를 만들어 불을 피었다.

예전에는 아이가 출생하면 7일간 금줄을 치고, 대문 앞에 황토를 깔아 부정을 막았다. 전통결혼식 때는 곡자상을 차려놓고 용떡이나 청실홍실을 매달아 놓거나 암탉, 수탉을 올려놓는다. 이를 독자상 또는 곡자상이라 하는데, 본인의 21대조 할아버지 가정 이곡 선생이 고려 말 때 원나라에 처녀를 바치는 공녀(貢女)제도를 원의 황제에게 상소하여 폐지시켰기 때문에 그 어른의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서 제사를 올리는 뜻으로 곡자상으로 내놓았다는 설이 있다.

그 당시 결혼식 때 신랑에게 재를 뿌렸는데 이는 잡귀를 없애준다는 뜻이었다. 수내동에는 초상이 나면 상여막에서 상여를 꺼내서 장례를 치렀다. 또한 마을에서 장례를 대비하여 윤달에 수의를 만들고, 상포계를 조직하였으며, 초상이 나면 각 집에서 팥죽, 국수, 양초, 술 등을 초상집에 보내 부조를 하였다.

1960년대까지 옷을 수선하여 입었는데 뚫어진 곳을 꿰매거나 옷을 만들 때 재봉틀을 이용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