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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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相穆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서승갑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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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 81 |
성별 | 남 |
생년 | 1876년 |
몰년 | 1908년 11월 4일 |
본관 | 영양(英陽) |
[정의]
한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문일(文一)이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에서 아버지 남진희(南晋熙)와 어머니 전주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유학적 가풍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몰두하였다. 성장 후 일본 감독의 가혹행위에 항의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바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항일 의병전쟁에 투신하였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왕면, 돌마면 등 현재의 성남 지역과 광주군 언주면 등 현재의 서울 지역, 그리고 용인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경기도 용인의 용천곡에서 활동하면서 친일파 일진회 송병준 별저를 습격하는 등 수차례 격전을 벌여 전승을 거두었다.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서 참모관으로 활동하면서 음성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1908년 8월 만주로 망명할 뜻을 품고 잠시 고향집에 들르러 행보를 재촉하던 중 광악산[지금의 수원] 부근에서 친일파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의 밀고로 느릿골에서 체포된 후 1908년 11월 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남상목의 유해는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광복 후에 고향인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분당 신도시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 이순이(李順伊) 여사와 합장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남상목의 공로를 기려 1983년 건국포장에 서훈하였고 이어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2008년 11월에는 순국 100주년에 즈음하여 성남문화원의 청원에 따라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이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