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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3208
한자 金萬基
영어공식명칭 Gim Mangi
이칭/별칭 영숙(永叔),서석(瑞石),정관재(靜觀齋),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종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3년 2월 2일연표보기 - 김만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87년 3월 15일연표보기 - 김만기 사망
부임|활동지 김만기 부임지 - 경기도 광주시
묘소|단소 김만기 묘역 - 경기도 군포시 대야2로 70[대야미동 158-3]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산
대표 관직 예조판서|광주부윤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김만기(金萬基)[1633~1687]는 광주부윤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의 참상을 잊지 말고 경계하라는 의미의 글을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에 남겼다.

[가계]

김만기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정관재(靜觀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문원공 김장생(金長生)이며, 할아버지는 김반(金槃), 아버지는 김익겸(金益兼)이고, 어머니는 해평 윤씨이다. 해평 윤씨를 위해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지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동생이다. 숙종(肅宗)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친정아버지, 즉 숙종의 장인이다.

[활동 사항]

김만기는 사람 됨됨이가 침착하고 깊이가 있었으며, 묵직하고 덕이 두터워서 구차하게 누군가를 헐뜯거나 비웃지 않았다. 젊어서 벼슬을 시작하여 청렴한 재량으로 중용되었다.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어진 선비들을 보호하고 간사한 말과 치우친 말을 가리고 막아 내어 선비들이 의지하는 바가 컸다. 외척이지만 권력이 안정된 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와 8년을 살다가 사망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일처리를 칭찬하였으며, 공명(功名)을 세울 적에 비록 취향(趣向)이 달랐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한 하자를 지적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종(顯宗) 때 광주부윤으로 재직하였는데,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에 남긴 기문(記文)에,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라고 하면서 후손들에게 병자호란의 참상을 상기시키고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학문과 저술]

김만기는 『서석문집(瑞石文集)』 18권을 저술하였다.

[묘소]

김만기의 묘는 경기도 군포시 대야2로 70[대야미동 158-3]에 있으며, 1992년 6월 5일 경기도 기념물[김만기 묘역]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만기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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