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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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岩回 |
영어음역 | Gim Amhoe |
이칭/별칭 | 김암회(金巖回)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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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
성별 | 남 |
생년 | 1881년 |
몰년 | 1936년 |
[정의]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
[활동사항]
안동시 임동면에서 태어난 김암회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이 침탈되어 식민지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자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 대열에 참여,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박처사 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박처사 의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예안과 안동·진보·영양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박처사의 실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의진을 결성한 후 대규모 항쟁보다는 소규모로 인원을 나누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박처사의 부하인 이화서와 김문호 등은 의병 약 30~40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자위단 및 영양군 순사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과감성을 보여 주었다.
김암회는 이러한 박처사 의진에 1908년 8월 23일부터 같은 해 11월 16일까지 참여하였다. 그는 박처사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30여 명과 함께 강원도 및 경상북도 안동, 영양, 평해 일대를 전전하면서 의병항쟁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1909년 7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형(流刑) 5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