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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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영어공식명칭 | Gimnyeong K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필준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64년 - 김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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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5세기 초 - 김질 충청남도 도고면 도산리에 입향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54년 - 김질 사망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6세기 말 - 김응남 출생 |
입향 시기/일시 | 17세기 초 - 김응남 충청남도 아산시 권곡동에 입향 |
본관 | 김녕 - 경상남도 김해시 |
입향지 | 어랑촌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느랭이마을 |
입향지 | 권곡동 - 충청남도 아산시 권곡동 |
세거|집성지 | 세거지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오암리|화천리 |
세거|집성지 | 세거지 - 충청남도 아산시 권곡동 |
묘소|세장지 | 김질 묘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느랭이마을 뒷산 자락 |
묘소|세장지 | 김응남 묘 -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용두3리 산골 |
성씨 시조 | 김시흥 |
입향 시조 | 김질|김응남 |
[정의]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김질과 김응남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세거성씨.
[개설]
김녕김씨(金寧金氏)는 경상남도 김해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며 시조(始祖)는 김시흥(金時興)이고, 아산시의 입향조(入鄕祖)는 김질(金秩)과 김응남(金應南)이다.
[연원]
김녕김씨의 시조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 문열공(文烈公) 김시흥이다. 김시흥은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에 재임 중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고려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고 천호(千戶)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고 금주군(金州君)에 책봉되면서 김녕[현재 경상남도 김해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김녕은 고려 말 김해로 개칭되어 김해김씨(金海金氏)라고도 불렸다. 선김(先金)[김수로(金首露)계 김해김씨], 후김(後金)[김녕김씨]으로 구분하여 왔으나 후손들이 구분을 확실히 하지 못하자 1849년(헌종 15), 1884년(고종 21) 두 차례에 걸쳐 청원하여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아 본관을 김녕으로 다시 환원하였다.
[입향 경위]
김질[1364~1454]은 충청남도 아산시에 거주하는 송암공파(松菴公派)의 입향조이자 파조(派祖)이다. 자는 국상(國祥), 호는 송암(松菴)이다. 고려 말 소부감(小府監) 소감(少監)을 역임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신창 어랑촌(漁郞村)[현재 도고면 도산리 느랭이마을]에 들어와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가 김질의 충절을 기려 도고산 자락을 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으로 사패(賜牌)[조선시대 국왕이 신하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려주거나, 공이 있는 향리에게 향리의 역을 면제해 줄 때 내리는 문서]하였다. 묘소는 도산리 느랭이마을 뒷산 자락에 있다.
김응남은 김녕김씨 15세손이다. 충의공파(忠毅公派)이며 아산시 권곡동 지역 김녕김씨의 입향조이다.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가 순절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6세손으로 김응남의 집안은 김문기가 처형된 후 경상북도 상주 관아에 노비로 배속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김응남의 아버지 김신학(金信鶴)[1583~?]이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으로 이주하면서 충청남도에 살게 되었고, 김응남이 아산시 권곡동에 자리 잡으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김응남이 어떤 경위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김응남의 묘는 서천군에 있다가 후손들이 아산시 탕정면 용두3리 산골에 모셨다.
[현황]
2015년 기준으로 김녕김씨는 전국적으로 57만 7793명이 있다. 송암공파 후손들은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와 오암리, 화천리 일대에 살고 있으며, 충의공파 후손들은 권곡동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