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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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金益生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Filial Son Gim Ik-saeng[Hyoja Gim Ik-saeng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270-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405년 - 효자 김익생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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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597년(추정) - 효자 김익생 정려 소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39년 - 효자 김익생 정려 복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3월 7일 - 효자 김익생 정려 아산시 향토문화유산 지정 |
현 소재지 | 효자 김익생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270-1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김녕김씨 종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아산시 향토문화유산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에 있는 효자 김익생의 정려.
[개설]
김익생(金益生)[1388~1450]의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성재(省齋)이다. 김녕김씨 아산 입향조 송암(松菴) 김질(金秩)[1364~1454]의 아들이며,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버지 김질은 고려가 망하면서 도고면 도산리에 들어와 절의를 지키며 여생을 보냈다. 김익생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평생 양친을 지성으로 섬겼다. 또한 문무를 겸비한 충신으로 진충보국하였으며 중추원부사와 예조판서에 올랐다.
김익생이 일곱 살일 때 어머니가 병환으로 식음을 전폐하다가 엄동설한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잉어를 구해드리고 싶어 간절히 기원하였는데 꿈에 누군가 나타나 연못을 가르쳐 주었다. 다음 날 연못에 가보니 갑자기 연못이 갈라지면서 잉어가 튀어나와 잡아다 드렸다. 그러자 점차 어머니 병환이 호전되었는데, 이번에는 배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한겨울에 배를 구할 길이 없어 이곳저곳 헤매다가 겨울밤 험한 산길을 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나더니 김익생을 업고 달려가 어느 절 앞에 내려놓았다. 그곳에는 배나무가 있었고, 나무 까치둥지에 배 한 개가 있어 가져다 어머니께 봉양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널리 알려져 1405년(태종 5)에 효자 정문을 받게 되었다.
[위치]
효자 김익생 정려는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에 있다. 도고산의 동쪽 산자락이다. 국도 21호선[온천대로]의 도고면 시전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지방도 645호선[도고산로]을 따라 도고저수지 옆을 지나며 4.2㎞ 정도 지점에서 오른쪽의 도산1리 느랭이마을 진입로를 따라 약 800m 들어가면 개울 옆에 효자 김익생 정려가 있다.
[형태]
효자 김익생 정려는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의 단칸 건물이다. 자연석을 두르고 시멘트로 조성한 기단 위에 긴 팔각 장주 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둥글고 짧은 기둥을 올렸다. 사면 벽의 하단부는 돌을 섞어 벽을 쌓고, 윗부분은 홍살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측면에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목재 부분에는 채색 단청이 이루어졌고 정려각 주변에는 자연석 돌담을 둘렀다. 정려 내부에는 명정 현판 대신 중앙에 비각기(碑刻記)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 두 기의 비(碑)가 세워져 있다. 비는 최근에 세운 것과 예전의 비가 있다.
1739년(영조 15)에 세워진 왼쪽 비석은 거북이를 모방한 듯한 방형의 대좌를 놓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효자 김익생지려 영락삼년 삼월일립 숭정후 재기미 삼월일 개건(孝子金益生之閭永樂三年 三月日立崇禎後再己未三月日改建)’이다.
1980년에 새로 세운 비석은 방형의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개석을 올렸다. 비신 앞면에는 ‘효자 자헌대부이조판서 성재김익생지려 1980년 5월 일(孝子資憲大夫吏曹判書省齋金益生之閭1980年 5月日)’이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광복 후 후손들이 옛길 옆에 옮겨 놓았다가 이제 음기만을 추가하여 새 길가 옛터 근처에 다시 옮겨 세우고 반 토막의 옛비는 이 정각 안에 묻었다고 기록하였다.
비각기는 영조 때에 동부승지를 지낸 임광필(林光弼)[1682~1743]이 1741년에 쓴 것으로, 정려를 받은 시기와 잃어버렸던 정려를 다시 찾아 복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임진왜란 때 정각은 불타버리고 비는 흙에 묻히게 되었는데, 경종 3년 큰 홍수가 있었을 때에 발견되어 영조 15년에 이를 본떠 다시 정각과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로 오래된 비의 ‘숭정후 재기미’와 비각기의 ‘영조 15년’은 같은 해로 서기 1739년이다.
[현황]
효자 김익생 정려는 2006년 3월 7일 아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효자 김익생 정려는 다른 정려의 구조와 비교하여 명정비가 없는 대신 비각기를 정려의 중앙에 걸어 놓고 있으며, 그 아래에 비를 세우고 있음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