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05 |
---|---|
한자 | 任憲晦 |
영어공식명칭 | Im Heonhoe |
이칭/별칭 | 명로(明老),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출생 시기/일시 | 1811년 - 임헌회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36년 - 임헌회 감시 초시 입격, 복시 낙방 |
활동 시기/일시 | 1857년 - 임헌회 노력재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858년 - 임헌회 독성서사에 배향 |
활동 시기/일시 | 1861년 - 임헌회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사직 |
활동 시기/일시 | 1862년 - 임헌회 김평묵과 성리설에 관한 논쟁 |
활동 시기/일시 | 1864년 - 임헌회 장령, 집의, 장악정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65년 - 임헌회 호조참의에 임명, 만동묘 제향 폐지 반대 상소를 올림 |
몰년 시기/일시 | 1876년 - 임헌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85년 - 임헌회 숭덕사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902년 - 임헌회 내부대신에 추증 |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삼은리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 |
수학|강학지 | 강학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
사당|배향지 | 독성서사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179 |
사당|배향지 | 숭덕사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734-19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풍천 |
대표 관직|경력 | 호조참의|대사헌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학자.
[개설]
임헌회(任憲晦)[1811~1876]는 19세기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많은 관직들을 사양하고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송시열의 제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강제(剛齋) 송치규(宋穉圭),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며 아산 지역에서 활동 당시 전우 등이 찾아와 수학하였다.
[가계]
임헌회의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증직된 임천모(任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익화(洪益和)의 딸이다.
[활동 사항]
임헌회는 온양현에 살고 있던 토실(土室) 이단용(李端容)을 10여 년 동안 종유(從遊)[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였으며 강제 송치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등 당대의 거유들과 왕래하였다.
1836년(헌종 2) 감시(監試) 초시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복시(覆試)에서 떨어지자 송치규를 찾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842년(헌종 8)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홍직필의 제자가 되었다. 1857년(철종 8) 아산 지역에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는 작은 학교를 만들고 ‘노력재(努力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는 경건한 마음으로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끝까지 찾아 앎을 이루고,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858년(철종 9) 효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철종 12)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經筵官)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掌令), 집의(執義), 장악정(掌樂正)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만동묘(萬東廟)[명나라 신종(神宗)을 위해 세운 사당]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1년(고종 13) 공주 삼기[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로 옮겨 왔고, 1873년(고종 15) 공주 명강동[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으로 옮겨 살았다. 1874년(고종 11)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사헌부대사헌, 성균관좨주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77년(고종 14) 공주 성전[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임헌회는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일찍이 이이와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기론을 주장하였는데, 임헌회의 학설은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의 김평묵(金平黙)과 대립하면서 1862년(철종 13) 서신으로 성리설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기호학파에서 척사를 주장하며 의병 운동에 적극 개입하였던 이항로의 화서학파와 뚜렷이 대비된다. 또한 천주학을 극력 배척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조선유현연원도(朝鮮儒賢淵源圖)』를 보면 임헌회의 문하생으로 영암(寧菴) 정달영(鄭達泳), 이재(履齋) 조장하(趙章夏), 독수재(篤守齋) 윤치중(尹致中), 자겸와(自慊窩) 유대원(柳大源), 불궤재(不匱齋) 이재구(李載九), 전우 등 115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호서 지역의 성리학에 끼친 임헌회의 영향력은 매우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집으로는 『전재집(全齋集)』, 『고산집(鼓山集)』, 『속고산집(續鼓山集)』이 있다. 그 밖에 임헌회가 문인들에게 명하여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 김장생(金長生), 송시열의 문집에서 명언들을 뽑아 책으로 엮게 한 『오현수언(五賢粹言)』이 1905년에 간행되었다.
[묘소]
임헌회의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상성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헌회는 1902년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정2품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에 있는 독성서사(獨醒書社)와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있는 숭덕사(崇德祠)에 배향되었다. 독성서사 배향위(配享位)는 임헌회를 비롯한 효정공(孝貞公) 죽실(竹室) 임홍망(任弘望), 충정공(忠定公) 강개옹(慷槪翁) 임창(任敞), 충헌공(忠憲公) 서재(西齋) 임징하(任徵夏) 등 4위이며 향사일은 음력 3월 11일이다.
숭덕사는 임헌회를 비롯한 전우, 이재구(李載九), 김준영(金駿榮), 이유흥(李裕興), 조홍순(趙弘淳), 임헌찬(任憲瓚) 등 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1885년(고종 22) 함경도 홍원에서 임헌회를 제향해 오다 남북 분단 후 1978년 전국 유림의 발기로 임헌회의 유허지가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세우게 되었다. 1990년 유림이 연기면 세종리에 서원을 세워 덕성서원(德星書院)이라 칭하였으며 칠현을 배향한 사우는 숭덕사라 하였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 3월 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