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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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漢一 |
영어공식명칭 | Gwak Hanil |
이칭/별칭 | 원우(元佑),장암(壯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궁평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만정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 곽한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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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895년 - 을미사변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곽한일 경기도 안성 지역 의병 운동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2년 - 곽한일 허칙과 함께 『대동정로』 편찬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05년 - 을사늑약 체결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5월 - 곽한일 홍주의진 돌격장, 소모장으로 활약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10월 - 곽한일 의병 수백 명 예산 일대에 동원, 예산읍 총공격 결정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11월 17일 - 곽한일 일진회원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8월 - 곽한일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에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곽한일 석방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3년 - 독립의군부 사건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1월 - 곽한일 독립의군부 사건에 참여, 독립의군부 총무총장에 임명, 김재순과 대면 후 운동자금 조달 약속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3월 - 곽한일 김재순에게 운동자금 전달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4월 - 곽한일 일경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8월 - 곽한일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곽한일 집행유예로 석방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 곽한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곽한일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곽한일 건국공로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곽한일 묘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곽한일 애국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6년 - 송남초등학교 영화 「잊혀진 장군」 제작 및 보관 |
출생지 | 경기도 여주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궁평리 |
묘소 | 곽한일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독립의군부 총무총장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곽한일(郭漢一)[1869~1936]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출신으로 1906년(고종 43) 홍주의진(洪州義陣)에 참여하여 돌격장,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였다. 종신 유배형을 받고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智島)로 유배되었으나 1912년에 풀려났다. 1913년 독립의군부에서 총무총장(總務總長)으로 활동하다가 1914년 일제로부터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1916년 집행유예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1936년 사망할 때까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가계]
곽한일의 자는 원우(元佑), 호는 장암(壯菴)이다. 1869년(고종 6) 12월 15일 경기도 여주에서 청주곽씨(淸州郭氏) 31세손 곽승현(郭升鉉)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부호군(副護軍) 곽치섭(郭致燮)이다. 아버지 때 아산군 송악면[현재 아산시 송악면]으로 이주하였으며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아산군 송악면 궁평리 194이다.
[활동 사항]
곽한일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1896년(고종 33) 경기도 안성 지역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충청남도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며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05년(고종 42) 11월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2월 남규진(南圭振)과 함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갔다. 최익현은 "호서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민중의 뜻을 격려하여 빨리 군사를 일으켜 영남·호남과 함께 기각(掎角)[앞뒤에서 적을 몰아침]의 형세가 되도록 하다가 만일 여의치 못하면 그대도 남하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며, 사방의 군사를 모으고 지휘할 수 있도록 성명을 도장에 새겨 주었다. 이와 더불어 격문과 존양토복(尊攘討復)[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쳐 나라를 되찾음]이란 깃발을 주며 선봉이 되라 하였다.
1906년 5월 19일 홍주의진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 1,1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홍주성[현재 충청남도 홍성군]을 점령하자, 곽한일은 5월 27일 남규진으로 하여금 예산에서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의거 초기 의병 400여 명과 더불어 홍주성 인근에 있는 해미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민종식이 홍주성에서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9일 홍주성에 진입, 합류하였다. 홍주성에서 돌격장, 소모장으로 활약하며 일본군과 진위대(鎭衛隊)를 격퇴하였다. 일본군이 보병 2개 중대, 기병 1개 소대, 기관포대, 폭파대 등을 동원하여 쳐들어오자 일본 군병 10여 명을 사살하고 4명을 잡아 처단하였으나, 의병도 83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체포당하는 등 치열한 저항 끝에 5월 31일 홍주성에서 후퇴하였다.
이후 최익현이 이끄는 순창 의병 부대로 합류하려 했으나, 이미 그쪽도 실패하였기에 독자적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10월 무렵에는 예산읍에서 북쪽으로 10리[약 4㎞] 거리에 있는 한곡[현재 예산군 대술면]에 살고 있는 이용규(李容珪)의 족형(族兄)인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김덕진(金德鎭), 이용규(李容珪), 박윤식(朴潤植) 등과 회의를 갖기도 하였고, 의병 수백 명을 예산 일대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1월 20일을 기해 예산읍을 총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일진회원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11월 17일 일본 헌병대에게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체포된 곽한일은 공주경무청에서 경성평리원으로 이감되는 등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07년(고종 44) 7월 3일 고종이 종신 유배형을 승인하여 8월에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로 유배되었다.
1912년에 풀려난 곽한일은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13년 1월에는 독립의군부 사건[혹은 온양사건]에 참여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비밀리에 의대조(衣帶詔)[옷에다 써서 내린 명령]를 받아 독립의군부 총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독립의군부는 1912년 9월부터 1913년 1월까지 고종의 밀조를 확인하면서 만들어진 유림 세력 중심의 독립운동단체로서 척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12년 12월 전라북도 순창에서 최익현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 대마도에 유배되었던 임병찬(林炳瓚)이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巡撫大將)으로 임명되었으며, 도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무력 항거뿐 아니라 국권 반환 요구 등 다양한 항일투쟁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1913년 1월 임병찬은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로 파견하여 참판을 지낸 이인순(李寅淳), 곽한일, 이명상(李明翔), 전용규(全鎔圭)와 국권회복운동 대사를 협의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독립의군부 정의(正意)를 제정하고, 총무·참모·회계·사법·군무(軍務) 등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맹원(盟員) 모집과 군자금 조달에 분주하였다. 이때 곽한일은 이인순으로부터 또 다른 국권회복운동을 벌인다는 김재순(金在珣)의 말을 전해 듣고 1월 중에 김재순을 대면하게 된 자리에서 그 계획의 진부를 확인한 후에 여비와 운동자금 조달을 약속하였다. 이어 동지인 전용규, 이정로(李鼎魯)와 협의한 후 온양군 일북면 덕지[현재 아산시 탕정면]에 사는 윤천보(尹天普), 윤익동(尹翼同)과 평택군 서면 목정리[현재 경기도 평택시]에 사는 이일영(李一榮), 윤상보(尹尙普), 강태건(姜泰建) 등으로 하여금 전라도·충청도·경기도 등지에서 모은 금액 중에서 300원을 3월 하순경 김재순에게 내어주고, 계속 금원 조달을 약속하였다. 이후 4월에 김재순이 일경에 잡히면서 1913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김재순은 징역 2년, 곽한일은 징역 1년 6월, 전용규는 징역 1년, 이정로는 징역 6월의 형이 언도되었다. 이것이 독립의군부 사건 혹은 온양사건으로 8월 14일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곽한일은 출옥 후에도 항일운동을 지속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저술 및 작품]
1902년(고종 39) 허칙(許侙)과 함께 한국 유교의 정통성과 유교 숭상을 내세운 『대동정로(大東正路)』를 편찬하였다. 『대동정로』는 1903년(고종 40) 간행되었다.
[묘소]
곽한일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에 있으며, 1980년 아산군수가 세운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공로포장, 1990년 애국장에 각각 추서되었다. 의병장 시절 사용하던 장도(長刀)가 서울 서대문독립공원과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75-1에는 송덕비가 있다. 2005년 10월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세웠으며, 묘비의 전면에는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愛國志士郭漢一義兵將頌德碑)’라 적혀 있고, 후면에는 곽한일 의병장의 생애가 적혀 있다. 2016년 10월에는 송남초등학교 학생들이 곽한일 의병장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잊혀진 장군」을 제작하여 보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