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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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英烈 |
영어공식명칭 | Yun Yeongryul |
이칭/별칭 | 백웅(白熊),연구(蓮龜),경재(敬齎)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만정 |
출생 시기/일시 | 1854년 4월 15일 - 윤영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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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8년 - 윤영렬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윤영렬 규장각 검서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윤영렬 부사과, 상의원별제, 의금부도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3년 - 윤영렬 장악원주부, 사헌부감찰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1년 - 윤영렬 부호군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윤영렬 별군관 겸 의병소 통령으로 차출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윤영렬 내무아문 참의, 강계부사, 연안군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윤영렬 안성군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7년 - 윤영렬 육군보병 부위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2년 - 윤영렬 연기군수, 중추원의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윤영렬 육군보병 정위 역임, 남포군수 의원면직, 집포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윤영렬 육군참장으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윤영렬 가의대부에서 자헌대부로 승진 |
몰년 시기/일시 | 1939년 11월 4일 - 윤영렬 사망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부용산 |
성격 | 군인|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해평(海平) |
대표 경력 | 육군참장|자헌대부 |
[정의]
구한말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인.
[개설]
1878년(고종 15) 무과에 급제한 이후 대한제국 시기 육군참장(陸軍參將)과 여러 군에서 군수를 지냈다.
[가계]
윤영렬(尹英烈)[1854~1939]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백웅(白熊), 호는 연구(蓮龜) 또는 경재(敬齎)이다. 1854년(철종 5) 음력 4월 15일에 윤취동(尹聚東)과 윤취동의 두 번째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둘째 아들로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에서 태어났다. 형은 일제강점과 함께 남작(男爵) 직위와 은사금을 받은 윤웅렬(尹雄烈)이다.
윤영렬은 본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진숙(韓鎭淑)과 사이에 6남 2녀를 두었으며, 다른 소실에게도 3남 2녀를 두었다. 그중 차남 윤치소(尹致昭)의 아들이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다. 1927년에 한진숙과 회혼례식(回婚禮式)을 했으며, 지식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조카 윤치호(尹致昊)는 윤영렬이 죽은 다음 날 일기에 "그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순한문으로 편지를 쓸 수도 없었고 읽을 줄도 몰랐으나 사리분별을 잘하고 정직했다."고 기록하였다.
[활동 사항]
1881년(고종 18)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1882년(고종 19) 부사과(副司果)·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883년(고종 20)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91년(고종 28) 부호군(副護軍)을 각각 지냈다. 1894년(고종 31) 10월에는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하여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300명을 불러 모았으며 별군관(別軍官) 겸 의병소(義兵所) 통령(統領)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고종 32) 내무아문(內務衙門) 참의(參議)·강계부사(江界府使)·연안군수(延安郡守), 1896년(고종 33) 안성군수(安城郡守), 1897년(고종 34) 육군보병 부위(副尉), 1902년(고종 39) 연기군수(燕岐郡守)·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1904년(고종 41) 육군보병 정위(正尉) 등을 거쳤다. 1904년 남포군수(藍浦郡守)로 부임하였다가 의원면직하였고, 집포관(戢捕官)에 임명되어 호서와 호남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 파견되었다. 1906년(고종 43) 육군보병 정령(正領)으로서 삼남집포사령(三南戢捕司令)의 공적으로 육군참장(陸軍參將)에 임용되었다. 1910년(순종 4)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에서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일제가 강점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칩거하였다.
윤영렬은 1939년 양력 11월 4일 사망했으며, 묘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부용산에 있다. 2013년에는 향토유적 지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장남 윤치오(尹致旿)는 일제강점기 때에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 차남 윤치소 역시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등을 지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묘소]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부용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