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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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蔡東喬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Filial Son Chae Dong-gyo[HyojaChae Dong-gyo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만전당길97번길 3[대동리 10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855년 - 효자 채동교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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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효자 채동교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만전당길97번길 3[대동리 103-1] |
성격 | 정려 |
양식 | 도리식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효자 채동교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채동교(蔡東喬)[1772~1824]는 본관이 평강(平康)이고 염치읍 대동리에 5대째 세거하였다. 아버지는 이조정랑을 지낸 채지영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며 채동교는 2남 1녀 중 장남이다. 채동교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예의 바르기로 마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부모님께서 잠자리에 들고 난 후에 잠을 청하였고, 아침에는 먼저 일어나 부모님의 건강을 살폈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자신의 불효를 책망하면서 모친의 병환이 빨리 낳기를 기도하고 백방으로 좋은 약재를 구해다가 다려드리는 등 극진한 간호를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한겨울에 갑자기 꿩알을 드시고 싶다고 하니 매일같이 산속을 헤매어 구해서 드렸다. 또 어느날은 생대추를 먹고 싶다고 하여 구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묵은 대추나무에 대추가 열려서 갖다 드렸다. 이런 노력으로 어머니 병환에 차도가 있어 건강을 되찾았다.
채동교의 나이 50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여막을 짓고 묘를 지켰다. 아침저녁 애통해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며 시묘를 하니 결국 몸이 상하여 채동교도 곧 세상을 떴다. 채동교의 지극한 효행을 마을 사람들이 적극 알려서 1855년(철종 6)에 효자 정려가 내려졌고 통덕랑에 추증되었다.
[위치]
효자 채동교 정려는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있다. 대동리 황골마을은 현충사 북동쪽 1㎞ 남짓한 곳에 있는 마을이다. 지방도 624호선[이순신대로]의 백암교차로에서 북쪽으로 백암2리 구무골을 지나며 2.2㎞ 남짓 가면 대동리 마을회관 앞에 이른다. 그 맞은편에 효자 채동교 정려가 있다.
[형태]
효자 채동교 정려는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의 단칸이며 도리식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시멘트로 방형의 기단을 구획한 뒤 이중의 팔각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사면에는 홍살을 시설하였는데 하방 아래는 시멘트 벽으로 구축하였다. 익공은 이익공 양식으로 그 위 봉두를 조각하였으며 창방과 도리 사이에는 두 개의 화반으로 가구하였다. 좌우 측면에는 부채꼴 형태의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내부에 걸린 명정 현판에는 ‘효자 통덕랑채동교지려 철종을묘명정(孝子通德郞蔡東喬之閭哲宗乙卯命旌)’이라 쓰여 있다. 바탕은 짙은 주황색이고 글씨는 흰색이다.
[현황]
최근 효자 채동교 정려 주위 3면에 벽돌을 쌓아 담을 둘렀으며, 앞면은 문기둥을 세우고 철제 살문과 철제 난간을 설치하였다. 울타리 안의 정려 옆에 채동교와 정려 관련 사항을 기록한 비석을 세워 놓았다.
[의의와 평가]
효자 채동교 정려는 염치읍 대동리에 살았던 채동교가 한겨울에 꿩알을 찾아다 드릴 만큼 지극한 효행을 실천했음을 보여 주는 아산의 소중한 문화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