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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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東萊鄭氏旌閭-忠婢福伊壇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동리 9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서정수 |
건립 시기/일시 | 1681년 - 열녀 동래정씨 명정이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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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693년 - 열녀 동래정씨 정려 건립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3년 - 열녀 동래정씨 정려 중수 |
현 소재지 | 열녀 동래정씨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동리 95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관리자 | 청송심씨 진사공파 종중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동리에 있는 열녀 동래정씨의 조선 후기 정려와 충직한 노비 복이를 기리는 비와 단.
[개설]
열녀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도사(都事) 정운길(鄭雲吉)의 맏딸로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의 심해(沈諧)와 혼인하였다. 동래정씨는 심해와 서울에 살고 있었다.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임진왜란 때 안전했고 친정 식구들이 피난해 있던 전라도 함평으로 피난 갔는데 전라도가 위험해지자 전라도 영광에서 배를 타고 다시 피난하였다. 그런데 칠산 앞바다에서 왜적의 배를 만나 포위를 당하는 위기에 처하자 함께 있던 고령의 여자 종 복이(福伊)에게 당시 세 살이었던 아들 심광렴(沈光濂)을 잘 길러줄 것을 당부하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함께 배에 탔던 동래정씨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포함하여 친척과 친지 부인들도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모두 12명이어서 그들을 12열부 또는 12절부라 일컬었는데, 그들의 일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전란 후 흔들리는 민심을 다잡기 위해 1617년(광해군 9)에 왕명에 의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편찬하면서 ‘열부동익(烈婦同溺)’이라 하여 12열부의 이야기를 실었으나 이들의 정려 건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려기(旌閭記)에 의하면, 심광렴의 손자 심두(沈枓) 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연명으로 정려를 요청하여 1693년(숙종 19)에 명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위치]
아산시 음봉면 산동3리 뫼골마을에 있다. 지방도 628호선[음봉로]과 지방도 624호선[탕정면로]이 만나는 음봉면 산동교차로에서 북쪽으로 지방도 624호선[산동로]을 따라가다가 약 2.2㎞ 지점의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700여m 가서 고속철도 고가철로 전의 오른쪽의 마을길로 700여m 올라가면 산동3리 묏골 마을회관이 나온다. 그곳에서 오른쪽 길로 100여m 더 가면 정려 앞에 이르게 된다.
[변천]
정려기에 따르면 1693년에 후손이 직접 청하여 명정을 받았으며, 이후 5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실록』에 따르면 1681년(숙종 7)에 12절부가 함께 정려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정려를 명하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미 정문을 내리고 그 절행을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었는데 자손이 쇠잔해서 거행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후손들이 연명하여 상언하자 예조에서 다시 아뢰어 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판에 적혀 있는 1693년의 사적은 1681년에 명정 받은 후 정려를 건립하던 해일 것으로 추측한다.
[형태]
열녀 동래정씨 정려는 낮은 언덕의 남향 사면에 터를 잡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세웠다. 사면 벽에 홍살을 시설하고 있지만 전·후면은 하방 위에, 측면은 중방 위에 시설하였고, 나머지는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초익공 계통으로 겹처마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 안에는 중앙에 명정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 비를 세웠다. 명정 현판에는 정려기와 중수 내용 및 12명의 열녀를 함께 적고 있으며, 비는 정씨의 정려기만을 적고 있는데 ‘열녀 증승훈랑사헌부감찰심해처정씨지려 숙종십구년계유인기손두상언특명정려(烈女贈承訓郎司憲府監察沈諧妻鄭氏之閭肅宗十九年癸酉因其孫斗上言特命旌閭)’라고 쓰여 있다. 정려각 바깥의 정면에 ‘열녀문’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는데 보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려를 바라보며 우측으로 충비 복이의 비(碑)와 단(壇)이 차례로 자리한다. 비석에는 ‘충비복이여사영세불망비(忠婢福伊女史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단은 화강석 장대석 3단의 높은 기단 위에 대좌를 놓고 그 위에 가로로 긴 오석 비를 올렸고, 앞면에 사적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있는 해당 그림을 선각하였다. 대좌 앞면에 ‘충비복이지단’이라 새겨놓았다.
[현황]
1973년에 열녀 동래정씨 정려를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며 새로이 충비 복이의 단(壇)도 조성되었다. 아산시 음봉면 산동리 마을은 청송심씨 진사공(進士公)파의 세거지로 정려의 관리도 청송심씨 가문에서 담당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열녀 동래정씨 정려의 동래정씨 등 12열부를 통해 전란으로 인해 여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음을 절감할 수 있다. 봉건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희생을 강요했던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충비 복이의 비에 복이를 ‘여사’로 칭한 것이 특별하고 단 역시 정성껏 조성하였음이 돋보인다. 이는 그 당시 복이에 의해 살아 남은 심광렴이 청송심씨 산동리 입향조이고 가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복이에 대하여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후손들의 마음이 엿보인다. 열녀 동래정씨 정려와 충비 복이 단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 있는 아산의 문화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