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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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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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7년 - 정유재란 발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7년 9월 - 아산 이순신 본가에서 이면 사망 |
종결 시기/일시 | 1598년 - 임진왜란 종결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이순신|이순신 처 상주방씨|이면|이회|원균|송유진|이몽학|정조 |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일본이 충청남도 아산 지역을 포함한 조선을 침략한 전쟁.
[개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셋째 아들 이면(李葂)은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북상한 왜군(倭軍)이 이순신의 본가를 습격하자 이에 맞서 싸워 왜군 3명을 베고 순절하였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일가를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 있는 여수로 피난시켰다. 고령의 노모와 죽은 형들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1593년(선조 26)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일가를 따라 여수 고음천(古音川)[곰내의 한자 표기로 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으로 피난하였다. 이순신 일가는 임진왜란이 명(明)과 왜(倭)의 협상으로 소강 상태에 들어가고,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참소로 1597년 3월 감옥에 갇히자 여수를 떠나 본래의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당시 아산은 왜군의 진격로에서 비켜나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각종 전쟁물자를 징발하고 피난민이 몰리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산과 길목에는 도적 떼가 빈번하게 출몰하였고,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이몽학(李夢鶴)의 난 등 반란 사건도 연이어 발생하였다.
[경과]
명과 왜의 협상이 결렬되자 왜군은 재차 상륙하여 한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의 진격로는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전라도와 충청도를 유린하면서 진격하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의 피해가 컸다. 1597년 8월 남원을 점령한 왜군은 9월 부여, 임천, 한산으로 올라와 공주를 점령하고 천안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한성으로 향하던 왜군은 직산의 소사평전투(素沙坪戰鬪)에서 명군에게 패하여 북상이 좌절되었다.
패퇴를 시작한 왜군은 내포(內浦)의 각지를 유린하였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도 이때 왜군 패잔병이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아산에 침입한 왜병은 이순신의 본가도 유린하였다. 이때 이면은 아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왜병이 마을에 침입하자 활과 칼을 들고 싸웠다. 이면은 왜병 3명을 죽였으나 숨어 있던 왜병에게 칼을 맞아 순절하였다.
[결과]
아산의 본가와 연락이 끊기자 이순신은 명량해전(鳴梁海戰) 승전 후 아들 이회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이회의 서신을 통해 아산의 본가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소식과 이면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면이 죽자 매우 슬퍼하였으며 한 달 동안 이면이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한 이후 추숭(追崇)에 대한 움직임은 간간이 있어 왔다. 특히 정조 연간에는 정조가 주도적으로 나서 외적과 싸운 위인들을 추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순신의 아들들이 순사하였지만 정려(旌閭)와 증직(贈職)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이면, 이훈, 이신을 정려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논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면의 경우 아버지인 이순신 생전에 죽었기 때문에 효자로 정려할 수 없고, 벼슬도 없었기 때문에 충신으로도 정려할 수 없었다. 이에 정조는 몇 년을 기다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어명으로 편찬하고, 이면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하여 국가에서 기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