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88 |
---|---|
한자 | 孝子金鉉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Filial Son Gim Hyeon[Hyoja Gim Hyeon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송촌리 166-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서정수 |
건립 시기/일시 | 1675년 - 효자 김현 명정이 내려짐 |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65년 - 효자 김현 정려의 정려기 현판 제작 |
현 소재지 | 효자 김현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송촌리 166-1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송촌리에 있는 효자 김현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김현(金鉉)[1595~1637]의 본관은 김해, 자는 옥이(玉耳)다. 김해김씨 음봉면 대동 입향조 김합의 6대손이고, 제용감 봉사를 지낸 김인지의 아들이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였고, 계모를 맞이한 후에도 생모에게 한 것처럼 효로써 봉양하였다. 병자호란 이듬해에 부친을 모시고 당시 수원부에 속했던 인주 걸매리로 피신하던 중 갑자기 적군을 만나 공격을 받게 되자 몸으로 부친을 감싸 김현은 숨지고 부친은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675년(숙종 1)에 효행으로 명정을 내려받게 되었다.
[위치]
효자 김현 정려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송촌리에 있다. 음봉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지방도 628호선[음봉로]을 따라 동쪽으로 약 3㎞ 가면 도로 오른쪽의 송촌리 청계동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함께 있다.
[변천]
효자 김현 정려에는 1865년에 전재 임헌회(任憲晦)가 지은 정려기 현판에 중수 기록이 남아 있으나 간지로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형태]
효자 김현 정려는 청계동마을 입구에 대지를 조성하고 화강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칸 건물이다. 기단 위에 팔각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사방 벽면은 홍살로 둘렀고, 하방 아래는 초석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길게 늘어진 풍판을 달았다. 정려 주변 삼면은 돌을 섞은 시멘트로 담을 두르고 기와를 얹었으며 정면은 철제 난간을 설치하였다.
정려 안 중앙 바닥에 명정비가 있고 그 위에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방형 대좌에 규형 비신을 세운 명정비에는 "효자학생김현지려(孝子學生金鉉之閭)"라고 쓰여 있고, 현판에도 "효자학생김현지려(孝子學生金鉉之閭)"라고 쓰여 있다.
명정 현판 뒤에 새겨진 임헌회의 정려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산이란 고을은 호서 위쪽에 위치하여 왕의 덕이 가까울 뿐만 아니라 풍속도 문교를 숭상하여 충효열로 손꼽히는 분들이 많으니 죽동의 김효자도 그분들 중 한 분이다. 내가 이곳을 지날 때면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 후손인 영호, 상룡 등이 나를 찾아와서 공의 효에 대한 기록을 청함에 내가 감히 글을 못 쓴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공의 휘는 현이요, 자는 옥이이며 분성인[김해인]이라. 금녕부원군 충간공 보의 8세손이요, 제용감 봉사를 지낸 인지의 아들이라.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기질을 가지셨고 어려서부터 하늘이 낸 효성을 지니고 있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 부모님께 공양하였고, 항상 즐거운 표정으로 마음과 뜻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모친상을 당한 때에는 3년 동안 죽만 먹으면서도 날마다 어머니의 묘를 찾아 성묘하기를 잊지 않았고, 그 후에 계모를 섬김에도 낳아주신 어머님과 다름없이 효성을 다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병든 아버지를 업고 수원[현재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으로 가던 중 숲속에 숨었을 때 갑자기 적을 만나게 되었다. 적이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려 하자 공이 급히 나아가 몸으로 칼을 막고 쓰러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는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정축년 정월 18일이었다. 사방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실은 곧 마을에서 현으로, 현에서 도로 이어졌고, 도에서 조정에까지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인하여 숙종 을묘년에 특별히 정려를 하사받게 되었다.
옛날 강차옹은 어머니를 업고 난을 피하던 때에 도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애걸하면서 어머니의 안전을 구하였고 모자가 안전하였는데, 지금의 공은 그렇지 못하였으니 어찌 도적도 옛날의 도적과 오늘날의 도적이 차이가 있으며, 중국과 오랑캐의 도적이 차이가 있는가. 슬프도다. 성인이 증민시를 읽고 말씀하시기를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이 시를 통해 도를 깨달았다 하지 않는가.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있음에 그 만물의 법도 가운데 효가 으뜸이라. 어느 누가 그 부모에게 효를 행하지 않겠는가만 효가 적은 것은 곧 기질과 물욕이 있어 효를 가리기 때문이다.
공이 평소에 행했던 부모에 대한 효행은 그 어떤 사람보다 특출했으며 위급함을 당해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아버지의 생명을 구했으니 공은 실제로 진짜 효자이시라. 만일 기질과 물욕이 가려 단지 부모가 있음만 알고 자기 자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리오. 아, 아름다워라. 이제 공이 가신 지 어언 200여 년이 되었지만 정려는 오히려 우뚝 솟아 빛이 나니 뭇 사람들에게 훌륭하고 어진 마음을 생각하고 되새기면서 같이 따라서 행하고자 함을 불러일으키니 이같이 세상을 교화함에도 도움이 되었으니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공의 후손들은 또한 선조의 덕행을 본받아 살아가면서 욕되게 하지 말며, 나라가 선을 장려함에 뜻을 다하라. 김씨들이여, 흠모하여 생각할지어다. 공의 맏아들 남혁은 아버지가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을 때 너무 어려서 상례를 다하지 못한 것이 끝내 가슴이 아파 그 뒤에 3년간 상복을 입으셨다. 비록 예에는 지나치다 할지라도 효자가 계속 이어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애석하게도 그 일은 밝혀지지 않았기에 서로 관련이 있어 붙여서 기록해 둔다.
숭정4을축 봄 3월 병오 통정대부 호조참의겸 경연관 서하 임헌회 지음"
[牙之爲鮮處湖西止遊 王化近俗尙文敎以忠孝烈綽撫者在在炳琅竹東之金孝子閭其一也余忍之未嘗不鞠躬致敬日其後孫永浩相龍等謁記於金子不放以不文辭公諱鉉字玉耳盆城人金寧府阮君忠簡公普八世孫濟用監奉事仁社子也生有異質自 髫髫孝友天植山 樵 水漁以供甘旨愉色婉容以良心志母喪三年粥粥日必省墓事異顔之親無間所生當丙子虜亂擔病父到水原地同竄林間忽遇賊賊慾殺其父公急出以身之受刃而死其父得免乃丁丑五月十六日也遠近聞者莫不咨嗟流涕鄕聞于縣縣聞于道道聞于朝 肅宗乙卯 特命旌褒昔江次翁負母逃難遇賊求哀賊不忍犯或指避兵之方母子俱全今公獨不然豈盜賊赤古今華 之異耶噫聖人讀烝民詩曰爲此詩者其知道乎夫天地之間未有有物以無卽者物印之中惟孝爲先人孰不欲孝於其親孝者甚 尠直以氣質物欲有以之也公平日事親之節固已援出倫類以文能臨難損軀以代父命公可謂眞孝子也苟非不爲氣質物欲所 蔽只知有親不知有其身何以與此於乎休哉今去公爲二百餘年而烏頭赤脚尙此 巋然使人起好懿懿之良心思與之齊其有裨於世敎者詎可量哉爲公雲仍者赤念祖修德無恭所生乃不負 國家彰善之至意金氏乎欽念哉公允子南爀以父死於賊幼罔克執喪爲終身痛追服三年雄過於禮赤可謂錫類不□惜乎其無以闡發也 連書之以爲記
崇禎四乙丑春三月丙午 通政大夫戶曹參議兼經筵官 西河任憲晦 撰]
[의의와 평가]
효자 김현 정려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대신 적의 칼에 맞으며 조선시대 방식의 효를 실천한 김현의 효행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지배 이념과 사회 분위기가 개개인에게 끼치는 영향력, 평화의 소중함 등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