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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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영어공식명칭 | Pre-historic Period |
이칭/별칭 | 전사(前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나건주 |
[정의]
구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역사.
[개설]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아산 지역이 문자 기록을 통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36년의 탕정성(湯井城) 축성 기사이다. 이 이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문헌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문자 기록 이전 시기인 선사시대는 오로지 고고학 조사를 통해 확인된 물질 자료를 통해서만 그 문화상을 유추할 수 있다.
아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실옥동유적의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실옥동유적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찍개, 주먹찌르개, 여러면석기[다각면원구(多角面圓球)]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이 출토된 3유물층 위에 쌓인 토양층에서 확보된 시료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3만 년을 전후한 연대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3유물층의 형성 연대는 3만 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아산 권곡동유적, 아산 권곡동 청룡골유적, 아산 용두리 진터유적 등에서 측정된 방사성 탄소 연대와 OSL(Optically Stimulated Luminescence) 연대 측정 결과를 종합하면 아산 지역의 가장 이른 시기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기원전 7만 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소급된다.
빙하기 이후 현재와 같이 온난한 기후가 시작되면서 구석기시대에 이어 신석기시대가 시작된다. 아산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거가 밀집된 마을 유적이며, 기원전 3,500년~2,500년 사이의 기간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구석기시대 인류와는 문화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단절된 양상이며, 신석기시대 이른 단계의 유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단절은 청동기시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다만 청동기시대의 마을은 확인된 방사성 탄소 연대로 보아 기원전 1,300년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과는 1,200년 정도의 공백이 발생한다.
청동기시대 취락 사회의 기원과 계통은 대체로 한반도 북부와 중국 요동(遼東) 지역으로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송국리(松菊里) 유형의 성행기에는 논농사가 본격화되면서 사회 복합도가 증대되고 계층화된 사회로 점차 진입하게 된다. 아산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유적의 수는 신석기시대에 비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취락 사회가 성장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면 송국리 유형 성행기에는 상대적으로 유적의 수가 감소하는데, 인구의 중심지가 금강 중·하류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아산 지역이 다시 사회적 중심지로 대두되는 것은 청동기시대 후기이다. 청동기시대 후기는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와 좁은놋단검[세형동검(細形銅劍)] 등의 문화요소로 대표되는 시기로 토광위석묘(土壙圍石墓)[땅을 파서 장방형의 바닥을 만들고 관을 넣은 다음 그 둘레에 막돌을 둘러놓은 무덤], 돌무지돌덧널무덤[적석석관묘(積石石槨墓)], 구덩무덤[토광묘(土壙墓)] 등의 새로 등장하는 무덤 유적이 상징적이다. 새로 등장한 무덤의 내부에는 토기 외에 좁은놋단검, 청동꺾창[동과(銅戈)], 청동창[동모(銅鉾)], 고리[뉴(紐)]가 여러 개 있는 청동거울[다뉴경(多紐鏡)], 청동방울[동령(銅鈴)] 등의 화려한 청동 유물이 부장(副葬)되며, 점진적으로 철기도 추가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전의 송국리 유형 단계에서는 청동 유물의 개인 소유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에 비해, 후기가 되면 희소한 청동제 위세품(威勢品)을 독점하는 개인 유력자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계층 사회로 진입하였음을 의미한다.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전 괴정동유적, 아산 남성리유적, 예산 동서리유적 등이며, 남성리유적의 존재는 아산 지역에도 새로운 계층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농경 취락의 등장과 성장]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확인되는 선사시대 유적의 대부분은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취락 유적이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유적의 빈도는 매우 낮으며, 확인된 유적의 규모도 소규모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서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수십 기의 주거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 유적도 다수 확인되며, 크고 작은 취락이 아산 전역에서 확인된다. 경관적 조건이 양호한 낮은 구릉지에는 예외 없이 청동기시대 전기의 취락이 확인되고 있다. 취락의 밀집 분포는 농경을 통한 식량자원이 주변 지역에서 꾸준하게 공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에서 확인되는 주거지의 구조를 살펴보면 평면 형태가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이며 바닥 중앙에 2개 이상의 화덕이 설치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복수의 화덕이 설치된 주거지는 복수의 세대가 동거하는 확대가족적 성격의 세대공동체의 주거 형태로 상정되고 있다. 이러한 확대가족적인 동거 집단은 경작지 확보를 위해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화전(火田) 농경과 같은 조방적(粗放的)[주로 자연력에 의존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이동성이 강한 농경 방식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명암리유적, 용화동유적, 풍기동유적 등에서는 50기 이상의 주거가 군집된 대형 취락이 확인된다. 대형 취락에서는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집약적인 논농사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형의 저장용 항아리[호(壺)]와 개선된 반달돌칼[반월형 석도(半月形石刀)]의 구조, 마을 조성을 위한 벌채용 돌도끼[석부(石斧)]의 존재 등은 농경 생산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취락의 모습을 대변한다. 당시 취락 사회의 성장은 주변 지역으로 넓게 확산되었으며, 동시에 일부 취락은 대형화되어 인구가 모이는 중심지로 변모되어 갔다.
[계층 사회의 출현]
1976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 1기가 조사되었다. 돌널 내부에는 덧띠토기, 검은간토기[흑색마연장경호(黑色磨硏長頸壺)] 등의 토기와 함께 좁은놋단검 9점, 방패 모양의 청동기[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 1점, 거친무늬 청동거울[다뉴조문경(多紐粗紋鏡)] 2점, 대쪽 모양의 청동기[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 3점, 청동제 끌[동착(銅鑿)] 1점 등의 청동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또한 곱은옥[곡옥(曲玉), 옥으로 만든 장신구의 일종] 1점과 대롱옥[관옥(管玉), 구멍을 뚫은 짧은 대롱 모양의 구슬] 103점 등 천하석제(天河石製)의 옥으로 만든 그릇[옥기(玉器)]도 함께 출토되었다. 돌널무덤의 구조와 부장 유물의 구성 등에서 대전 괴정동유적에서 확인된 돌널무덤과 매우 유사한 양상이다. 정교하게 제작된 청동 유물이 다량으로 부장된 무덤의 피장자는 당시 지역 정치체의 수장으로 추정된다.
이전 시기인 송국리 유형 사회의 고인돌[지석묘(支石墓)]은 농경 공동체 사회의 거석 기념물로서 개인이 아닌 집단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집단 의례의 산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비파 모양의 청동제 칼[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등 청동기의 부장은 극히 소수의 무덤에서만 확인되며, 대부분은 부장 유물이 없거나 소량의 석기와 토기 위주로 확인된다. 이에 반해서 신창 남성리 돌널무덤에서는 다량의 청동 유물과 옥으로 만든 그릇의 부장이 확인되며, 이는 희소한 청동제 위세품을 독점했던 개인 유력자가 출현하였음을 알려 준다. 또한 청동제 칼, 청동거울[동경(銅鏡)], 곱은옥의 구성은 고대 사회 최상위 계층의 무덤에서 항상 세트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구성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이 신창 남성리 돌널무덤 단계이다.
개인 유력자의 출현은 이전의 농경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 질서가 구축되었음을 시사한다. 신창 남성리 돌널무덤 단계에는 유력자의 무덤이 군집을 이루지 않고 1기에서 2기 정도 소수의 무덤만 조성된다는 특징을 보인다. 철기가 부장되기 시작하는 단계에는 유력자의 무덤이 군집을 이루는 현상이 확인된다. 이는 엘리트 계층이 형성되었음을 시사하며, 이후 삼한으로 대표되는 고대 정치체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