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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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遺物 |
영어공식명칭 | Bronze Age Relic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나건주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
[개설]
덴마크의 고고학자 C. J. 톰센(Thomsen)은 인류의 물질문화를 석기 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의 산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삼시대법을 제창하였고, 이 분류법의 유용함은 곧바로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았다. 이후 V. 고든 차일드(Gordon Childe)는 청동기시대를 ‘도시혁명’으로 설명하면서 인류의 문명이 발생한 시기로 정의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문명의 발생은 청동기시대에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벼농사의 도입으로 발생한 생업 경제의 변화, 대규모 정주성(定住性)[이동이 비교적 적고 한 곳에 머묾] 마을의 등장에 의한 취락 유형의 변화, 고인돌[지석묘(支石墓)]·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과 같은 새로운 묘제의 출현, 민무늬토기[무문토기(無文土器)]와 반달돌칼[반월형 석도(半月形石刀)] 등 다양한 석제 농경도구의 보편적 사용에 의한 물질문화의 변동이 발생하는 시기로 설명되고 있다. 민무늬토기가 제작·사용되는 공간적인 범위는 중국의 요령성(遼寧省), 흑룡강성(黑龍江省), 길림성(吉林省) 등 동북 3성과 한반도 전역에 해당하며 동일한 문화권역으로 설정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개시기와 관련한 민무늬토기의 출현은 중국 동북 지방의 경우 기원전 2,000년을 전후한 시기이며, 한반도의 경우 기원전 1,500년 무렵 등장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청동기시대 유물은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제3지점의 제2문화층, 평안북도 강계군 풍룡리 돌널무덤, 평양시 금탄리유적 8호 집 자리 등에서 확인된다. 소형의 청동 도구와 장신구가 출토되었으며, 그 연대는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청동기를 제작하고 사용하게 된 데에는 동아시아, 유라시아 대륙에서 청동 야금술(冶金術)의 등장 및 발전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동기시대 시기 구분과 특징]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청동기시대는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에는 주거지 내부에 다수의 화덕이 설치된 장방형 주거가 특징적인데, 안에서는 구멍무늬토기[공렬토기(孔列土器)]를 비롯하여 짧은 빗금무늬[단사선문(短單線文)], X자문 등의 문양이 새겨진 민무늬토기가 출토된다.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붉은간토기[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도 확인된다. 석기류는 이단병식(二段柄式)[손잡이 중앙에 홈이 있어 상하로 구별되는 것]의 간돌검[마제석검(磨製石劍)], 이단경식(二短莖式)[자루에 끼우는 부분이 2단으로 된 것] 돌살촉[석촉(石鏃)] 등의 무기에서부터 양날돌도끼[양인석부(兩刃石斧)], 자귀[주상편인석부(柱狀片刃石斧)], 반달돌칼[반월형 석도(半月形石刀], 갈판[마곡석(磨穀石)]과 갈돌[석봉(石棒)] 등의 다양한 공구류가 제작된다. 곡물 수확구로 사용된 반달돌칼과 취락 조성을 위한 삼림 벌채용으로 사용된 양날돌도끼의 존재를 통해 곡물 재배와 함께 성장한 취락 사회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중기는 송국리(松菊里) 유형의 취락 유적이 성행하는 시기이다. 송국리 유형은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유적의 조사 성과를 토대로 설정되었는데, 송국리식 주거지[방형 또는 원형 주거지의 바닥 중앙에 2주식 기둥구멍이 더해진 타원형의 구덩이가 설치된 주거 형태], 외반 구연토기(外反口緣土器)[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토기], 삼각형 돌칼, 홈자귀[유구석부(有溝石斧)], 일단병식(一段炳式)[손잡이에 홈이 없는 것] 돌검 등의 문화요소로 특징된다. 송국리 유형 취락의 사회적 기반은 본격적인 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다. 농업 생산성 향상에 따른 잉여생산의 증가로 취락 간의 기능과 위계가 형성되며 분업화와 사회 복합도가 증가하게 된다. 송국리 유형의 형성과 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 자체 발생설과 한반도 외부에 기원을 두는 외래 기원설로 구분된다. 자체 발생설은 재지의 취락 사회가 점진적으로 변화·발전되어 송국리 유형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외래 기원설은 한반도 외부의 농경문화가 주민 이동에 의해 완성된 형태로 금강 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자체 발생설에서는 다수의 전기 취락이 밀집되어 분포하는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 등 곡교천 유역이 송국리 유형의 유력한 기원지로 논의되고 있다.
후기는 좁은놋단검[세형동검(細形銅劍)]을 비롯한 청동창[동모(銅鉾)], 청동꺾창[동과(銅戈)], 청동거울[동경(銅鏡)], 청동방울[동탁(銅鐸)] 등 다양한 청동 유물로 대표되는 본격적이고 다양한 한국식 청동기 문화가 나타나는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와 함께 검은간토기[흑색마연장경호(黑色磨硏長頸壺)], 굽다리접시 모양 토기[두형토기(豆形土器)], 고리 모양 손잡이 토기[환형파수(環形把手)] 또는 쇠뿔손잡이항아리[조합우각형파수부호(組合牛角形把手附壺)] 등으로 특징되는 덧띠토기 문화가 새로이 등장한다.
덧띠토기 문화는 중국 연(燕)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무력 충돌 과정에서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반도 남부 지방으로 유입되면서 성립된 것으로 보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덧띠토기 문화가 처음으로 남하했을 때에는 철기가 공반(供伴)되지 않지만, 단면 삼각형의 덧띠토기[단면삼각형점토대토기(斷面三角形粘土帶土器)] 단계부터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계통의 철기를 공반하게 되면서 청동기시대는 종료된다.
[아산의 유적과 유물]
충청남도 아산 지역 청동기시대 유적의 출현은 이전 시기의 신석기시대와는 문화적으로 단절된 양상을 보인다. 아산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의 발굴조사는 1990년 후반 군덕리유적, 신달리유적 등이 조사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주거의 형태가 불규칙하고 출토 유물이 빈약하여 기원과 계보를 추적하는 데에 한계가 분명하였다.
본격적으로 청동기시대 문화상이 확인되기 시작하는 것은 2001년 명암리유적[3·5·6·9·11지점]의 발굴 조사를 통해서이다. 명암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복수의 화덕이 설치된 장방형 주거로 구성된 것으로 구멍무늬토기를 중심으로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거의 형태와 출토 유물로 보아 소위 역삼동(驛三洞)·흔암리(欣巖里) 유형의 취락으로 기원전 1,000년~800년에 형성된 것이다. 아산 지역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취락은 대부분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청동기시대와는 대략 2,000년 정도의 시간 차이를 보이며 유물상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아산 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아산 지역에서는 탕정면을 중심으로 대규모 산업단지 및 택지개발이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이로 인한 구제조사도 성행하게 되었으며 다수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조사되었다. 아산 시가지 남동쪽 일대의 택지개발 지역에서는 용화동 가재골유적, 풍기동유적, 풍기동 앞골유적 등이 조사되었으며, 인근의 이순신종합운동장 부지에서는 풍기동 밤줄길유적, 풍기동 밤줄길유적Ⅱ가 조사되었다. 명암리유적이 조사된 탕정면의 산업단지 일대도 부지를 확장하면서 용두리 산골유적1·2, 용두리 진터유적, 명암리 밖지므레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적은 용화동 가재골유적, 풍기동유적, 풍기동 앞골유적이다. 세 유적은 지점을 달리하지만 동일 구릉지에 분포했던 단일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지 51기와 구덩이 모양의 집터[수혈유구(竪穴遺構)] 32기가 조사되었다. 동일 구릉지의 넓은 미조사 지역을 포함하면 실제 취락의 규모는 보다 대규모였을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취락의 형성에는 농경 생산이 뒷받침되었던 덕분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경 생산에 따른 사회 발달 양상은 출토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대형의 저장용 항아리[호(壺)], 곡물 수확구인 반달돌칼과 함께 탄화된 쌀 등이 출토되었으며, 대규모 취락 조성을 위해 삼림 벌채 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양날돌도끼와 권력의 발생과 관련된 간돌검 등의 유물도 확인된다. 아울러 의례용 내지는 특수 용도로 추정되는 붉은간토기[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와 굽다리를 붙인 토기[대부토기(臺附土器)] 등도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