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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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口碑 傳承 |
영어공식명칭 | Oral Heritages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상우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지역에서 전해오는 민요 및 설화.
[개설]
한 지역에서 구비(口碑) 전승되는 것은 주로 민요[노동요, 의식요, 유희요]와 설화[광포 설화와 지역 설화]이다. 민요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불리고, 설화는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민요는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가 대다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설화는 광포(廣布) 설화와 지역 설화가 있는데, 보령 지역의 유명한 설화로는 「반[외]쪽이」, 「이산해설화」가 있다.
[보령의 민요]
충청남도 보령 지방의 민요는 지리적 특성상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농업과 어업 관련 노동요가 많은 편이다.
농업 노동요는 모심기, 논맴소리, 개상질, 귀갓길소리, 밭매기, 도리깨질소리, 물품기, 흙가래질소리, 삼삼기노래, 소부림말 등이 있다. 어업 노동요는 주목망(柱木網) 어로요, 짚줄꼬는소리, 줄사리는소리, 배치기, 갈치잡이노래, 굴 따는 노래 등이 있다.
동요 및 처녀 총각들의 놀이요는 동물요[잠자리, 부엉이, 까치], 다리 헤는 소리, 말 잇기, 자장가, 등불써기노래, 접신(接神)놀이노래 등이 있다. 의식요(儀式謠)는 당제 축문, 안택고사, 여러 가지 독경 및 상례와 관계되는 초혼, 반함, 널액막음소리, 발인축, 운상(運喪)소리, 회다지소리 및 묘터 가래질소리 등이 있다.
보령 민요의 특색을 보면 지리적으로 충청남도 부여군·서천군·홍성군과 인접해 있어서 이들 지역과 영향 관계가 상당히 많다. 특히, 충청남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인접해 있어 경상도와 전라도의 특색을 공유하는데, 보령의 민요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여기에 보령 소재 섬에서 불리는 바다 관련 민요는 보령 민요의 위상을 높인다고 할 수 있다. 보령 민요 중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모심는 노래이다. 보령 지역의 모심는 소리는 상사류에 속한다. 다만, 홍성군 결성과 인접한 보령시 천북면 궁포리에서는 문화 중심인 겹상류가 나오는데, 이는 궁포리가 예전에 홍주군과 오천군 그리고 보령군에 편입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보령 지방의 논맴소리에는 얼카덩어리류[긴소리, 순수 잦은소리], 궁포리 산요, 노천만물소리, 술미소리 등이 있다. 얼카덩어리류는 충청남도를 대표하는 논맴소리로 그 문화 중심은 홍성·서산·당진과 충청남도 서북부 지방이다. 다만, 보령의 동부 지역에서는 지리적 영향으로 얼카덩어리류는 불리지 않고 있다. 천북면 궁포리에서는 ‘산요’ 곡이, 웅천읍 노천리에서는 노천만물소리, 오천면 장고도에서는 술미소리가 보령 지역의 특색으로 불리고 있다.
보령 민요는 어로요가 다양하고 풍부하게 전승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로요는 주로 오천면의 섬 지역에서 불리는데, 녹도(鹿島)에서는 주목망 어로요가, 장고도에서는 배치기노래와 굴 따며 하던 노래가, 삽시도에서는 배치기와 갈치잡이 노래가 있다. 이 중에서 녹도의 예를 들면, 녹도에서는 주목망을 쳐서 고기를 잡았는데, 주목망은 긴 원추형의 낭망(囊網) 또는 대망(袋網)을 지주와 닻으로 고정하여 조류를 따라 내왕하는 어류가 어망 속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잡는 재래식 어망이다. 바닷속에 나무 기둥[柱木]을 세우고 망을 쳐서 고기를 잡는다.
배치기노래는 만선(滿船) 풍어 노래이다. 귀향길의 고깃배가 만선의 표시로 봉기를 꽂고 봉기 위에는 연화(蓮花)를 받아 만선의 기쁨을 나타내는 동시에 거래할 물량이 있음을 알린다. 이때 배 위에서 꽹과리를 치며 흥겹게 노래한다. 이 노래는 마을 어귀에 만선 귀향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갈치 낚는 소리는 녹도 위의 호도(狐島) 근해에서 밤에 낚시로 갈치를 낚으며 혼자 푸념하듯 촘촘히 읊조리는 소리로, 용왕님께 갈치를 많이 잡게 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보령 지방의 동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물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동요는 잠자리 동요이다. 잠자리 동요는 아이들이 손이나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 잠자리가 멀리 달아나지 않고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다리 세는 동요는 아이들 여럿이 두 다리를 뻗고 마주 앉아 그 다리가 서로 맞물리게 한 다음에 다리 세는 소리에 맞추어 차례로 다리를 짚어 나가다가 노래가 끝나는 박에 짚인 다리는 오므려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다리의 임자가 지게 되는 놀이 동요이다.
보령의 의식요는 비손, 농악 고사, 당제사 독축과 법사의 앉은굿 독경 및 상부(喪夫)소리가 있다. 보령 지방에 전래하는 동제(洞祭)는 주로 음력 정월 초사흘부터 십오일 사이에 택일하여 지냈다. 다만, 웅천읍 구룡리 마차울은 당제를 칠월 칠석에 지낸다.
상부소리로는 초혼, 반함, 널액막음소리, 방 밖 운구소리, 발인축, 묘터가래질소리, 운상소리 및 달구질소리 등이 있다. 초혼은 전국 공통적이다. 반함 때는 미루나무 또는 버드나무로 숟가락 모양으로 깎고 쌀알을 고인의 입 안에 떠 넣으며 “백 석이오, 천 석이오, 만 석이오”, “천 석이오 만 석이오 백만 석이오”, “천 냥이요 이천 냥이오 삼천 냥이오” 또는 “반함이오! 반함이오! 반함이오!” 하고 외친다.
평길 운상소리로는 비(非)넘차류가 대부분이나, 보령시 미산면 풍산리와 오천면 장고도에서는 넘차 내지 넘자류가 나온다. 또한, 청라면 황룡2리와 의평1리의 받음구 끝부분은 ‘너호’ 형태를 취한다. 대천4동 명천에서처럼 오르막을 오를 때 소리하지 않고 요령((鐃鈴)[놋쇠로 만든 종 모양의 큰 방울]만 흔든다.
[보령의 설화]
보령시의 설화인 「반[외]쪽이」 전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반[외]쪽이」는 광포 설화로, 전국에 퍼져 있는 설화인데, 보령시 대천읍 설화로 전승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어느 집에서 눈, 귀, 팔이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반쪽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나니 힘은 다른 사람보다 갑절은 강하였다. 그러나 두 형은 상병신에 힘만 센 반쪽이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하루는 반쪽이를 숲의 나무에 묶어 버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힘이 센 반쪽이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 와서는 집 근처에서 도로 땅에 처박아 심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반쪽이는 형[들]이 장가를 들어 즐겁게 사는 걸 보고 자신도 장가가고 싶어 어머니께 건넛마을 김동지의 딸에게 장가보내 달라고 한다.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타일렀지만, 반쪽이는 멋대로 김동지 댁에 찾아가 딸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당연히 김동지는 반대했고, 결국 딸을 지키려고 감시하자 반쪽이도 계속하여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결국 사람들은 피로에 지쳐 곯아떨어졌다. 이때 반쪽이가 몰래 침입해 집 안의 불을 모두 끈 다음 대문을 지키는 머슴의 상투를 문지방에 매어 놓고, 사랑에 들어가서 김동지 수염에 유황을 잔뜩 바르고, 색시 오라버니의 양쪽 손에는 방망이를 한 켤레 동여매 놓았다. 안마당으로 들어가서는 마당 귀퉁이에 쓰러져 자던 사람을 번쩍 들어 담 위에 허리를 걸쳐 놓았다. 또 다른 두 사람은 상투를 쌍으로 묶어 놓았다. 안채 지게 옆에 쓰러져 자던 사람들에게는 건넌방에 걸린 쇠죽솥을 떼어다가 엎어 씌워 놓았다. 김동지 며느리는 들어다 윗목 시렁에 허리를 걸쳐 얹어 놓고 한 손에는 작은 북, 또 한 손에는 채를 껴잡아 매두었다. 안방에 들어가서는 의장 밑에서 놋대야를 꺼냈다. 그리고 몇 대째 내려오는지 어마어마하게 큰 다듬잇돌에 김동지 아내의 허리를 걸쳐 묶었다. 양쪽 손에는 방망이 하나씩을 들려서 묶어 놓고 그 앞에는 대야를 엎어 놓았다.
이후 색시를 이불로 둘둘 말아 큰 소리로 “반쪽이 신랑이 색시 데리고 가신다.”라고 말하고 뛰쳐나간다. 잠에서 깬 사람들은 당황해 우왕좌왕하면서 반쪽이가 미리 만들어 놓은 술수로 난장판이 된다. 이후 반쪽이는 색시를 가마에 태워 김동지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뒤꼍으로 돌아가더니 얼굴 껍질을 한 겹 벗겨냈고, 그러자 온전하고 멀쩡한 미남자로 탈바꿈한다. 갑자기 미남자가 되어 벗은 허물을 들고 나오니 이를 본 식구들은 놀란다. 반쪽이는 “나는 원래 천상 선관이었는데, 잠깐 죄를 지어 흉한 허물을 썼다가 이제 기한이 차서 원래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여튼 이제는 반쪽이가 아니었으므로 김동지 집에서도 결국 허락하여 반쪽이는 그 집 색시에게 장가들고, 재산은 반을 갈라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급제까지 해서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반[외]쪽이」는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잘 먹지 못해 반쪽이로 태어났지만, 외모에만 문제가 있었지 다른 생활에는 문제가 없는 인물이다. 후반부에 나오지만 원래는 천상의 선관이었는데 죄를 지어 이 세상에 반쪽이로 태어났지만, 결국에는 그 허물을 벗고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결국, 이 설화는 고난과 역경을 잘 견디고 버티면 끝내는 행복한 결말이 온다는 것을 민중들이 믿고 있어서 계속하여 전파되고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와 관련한 설화이다. 이 설화가 보령의 한산 이씨에게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산해의 아버지인 이지번(李之蕃)[?~1575]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산해관에서 유숙하면서 집에 있는 아내와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지번의 아내도 같은 날 남편과 동침하는 꿈을 꾸었는데, 곧 잉태한 후 열 달 뒤에 아들을 낳는다. 이 일로 집안에서는 이지번의 아내를 의심하여 내치려 하였는데, 이산해의 삼촌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의 만류로 이지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결국, 이지번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하여 아내의 결백함을 입증한 후 아들의 이름을 꿈꾼 곳을 따서 ‘산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이산해의 부모가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서도 같은 꿈을 꾸었고, 그 꿈에서의 행위가 현실로 반영되어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이산해가 특이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출생담이다. 이는 한산 이씨 종중에서 전해져 오고 있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 6-5[전라남도 해남군 편]와 『계압만록(鷄鴨漫錄)』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