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79
한자 李山海
이칭/별칭 여수(汝受),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문충(文忠),죽피옹(竹皮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9년연표보기 - 이산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5년 - 이산해 을사사화 때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이산해 생원·진사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561년 - 이산해 식년 문과 병과 급제 및 승문원 등용
활동 시기/일시 1562년 - 이산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씀.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이산해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 접객.
활동 시기/일시 1578년 - 이산해 대사간으로 윤두수·윤근수·윤현 탄핵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이산해 병조참판, 형조판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1년 - 이산해 이조판서·우찬성 및 이조·예조·병조의 판서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8년 - 이산해 우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이산해 좌의정·영의정 역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이산해 정철 탄핵, 윤두수·윤근수·유공진 등 서인 영수를 파직 또는 귀양보냄.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이산해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이산해 영의정 복직
몰년 시기/일시 1609년연표보기 - 이산해 사망
출생지 황화방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묘소|단소 이산해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북인의 영수로서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이른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어린시절 친가의 세거지였던 충청남도 보령에 거주하였고, 이산해의 후손들이 한산과 아산 일대에 정착하여 세를 이루었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장윤(李長潤), 할아버지는 이치(李穉)[1477~1507]이다.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1508~1575],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이 작은아버지이며, 이산보(李山甫)[1539~1594]와 사촌이다.

[활동 사항]

이산해는 1538년 한양 황화방(皇華坊)[조선 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서부 행정 구역 중 하나. 현 중구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그 무렵 토정 이지함이 충청남도 보령 서쪽 고만산에 선영을 잡고 “해년(亥年)이 되면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라고 예언하였는데, 이산해가 태어나자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라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5세 때부터 작은아버지 토정 이지함에게 글을 배웠다. 6세에 이미 글을 읽고 쓸 줄 알아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독서에 몰두하니 이지함이 책을 내려놓고 밥을 먹으라 하자, 이에 대해 배움에 더딤이 있겠느냐는 시로 화답하였다. 11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에 뽑혔지만, 어린 나이라 일찍 출세하는 것을 염려하여 회시(會試)에는 직부(直赴)하지 않았다.

20세인 1558년 생원·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의 방목(榜目)에 모두 거주지가 보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과 급제 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子)로부터 출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며 50세에 우의정, 52세에 영의정에 오르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어 아계부원군(鵝溪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재위: 1567~1608]를 호종하여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는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고, 평해(平海)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글을 남겼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복직되고 대제학(大提學)을 겸하였다. 1599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지만, 1600년 다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복직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이산해는 내·외직을 겸임하며 전국 곳곳에 자취를 남겼지만, 자신의 고향을 보령이라고 인식하였다. 홍주 사람 권승(權昇)의 묘갈명에 “나의 집이 보령에 있다. 보령과 홍주는 인접하여 보령에서 서울로 가다가 그의 문앞을 지나면 음식을 대접해 주기도 하였다.....” 라는 글을 남겼다. 조상의 묘가 보령 고만산에 있고 아버지가 보령에 거주하였으므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면 보령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섬겼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보령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어머니의 상도 똑같이 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보령에서 생활하였으므로 나라에서는 보령으로 교지를 보내 왕의 뜻을 알렸다. 부인이 사망한 후에는 선영의 땅이 좁아 보령 귀두리(歸頭里)에 폄장(窆葬)을 해 두었다가 예산(禮山) 다지동(多枝洞)에 이산해의 묘를 조성할 때에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이산해는 관직에 있을 때에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둔전과 자염(煮鹽)의 활용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자염의 활용은 어릴 적 보령 바닷가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소금의 중요성과 활용성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으며,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도 뛰어났다. 후손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이산해의 장례 때에 사위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영의정으로 호상을 맡았고, 막내사위 안응형은 한산군수로, 외손 이여규는 아산현감으로 참여하였다. 이산해 가문은 보령, 예산, 아산 일대에 크게 세거하였고 그 위상도 계속 이어졌다.

[학문과 저술]

이산해의 저서로는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묘소]

충청남도 보령 귀두리(歸頭里)[현 갈머리]에 있었으나,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으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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