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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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광균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2차에 걸쳐서 침략하여 보령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는 명(明)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비켜 달라는 구실로 1592년(선조 25)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은 수도인 한양이 함락당했으나 국왕 선조(宣祖)[재위: 1567~1608]가 의주로 피난하였고, 명의 참전,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해전 승리, 관군과 의병의 반격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은 일본과 강화(講和)를 논의하였으나 1596년(선조 29) 결렬되었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고, 1598년(선조 31) 전쟁이 종결되었다. 1차로 일본이 임진년에 침략하여 ‘임진왜란’, 2차로 정유년에 침략하여 ‘정유재란’이라고 하나 일반적으로 이를 통틀어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무로마치[室町] 막부 말기부터 전국이 분열하여 각 세력 간에 전쟁이 지속되었고, 이를 15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로 인한 제후(諸侯)와 무사들의 군공(軍功) 욕심과 불만을 해결하고, 국내의 안정을 위해 명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조선에 대마도주(對馬島主)를 보내, 조선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명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실정(實情)과 의도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통신사로 파견된 황윤길(黃允吉)[1536~?]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가지고 있어 전쟁의 위협이 있다고 하였고,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에 따라 일본이 침략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다만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김성일은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통신사가 모두 전쟁의 가능성을 말하면 조정과 백성들이 모두 불안에 빠질까 염려하여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후 왜관(倭館)에 있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모두 소환되는 등 전쟁의 징후가 뚜렷해지자 조선은 병기와 성지(城地)를 정비하였다.
[경과]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조선을 침략할 것을 명하였다. 일본이 4월 13일 부산포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 일본군은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한양으로 북상했기 때문에 충청도 지역은 한양의 길목인 충주와 청주 지방이 중점적으로 피해를 당하였고, 보령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특히 이순신이 해전을 승리하여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면서 충청수영이 있는 보령 앞바다는 전장(戰場)이 되지 않았다.
1592년 7월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이후 조정에서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하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두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이 겸직으로 임명되었고, 충청수군도 삼도수군통제사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다만, 충청수군은 남해안과 거리가 있어 일부만 해전에 참여하고, 육상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충청도 지역은 한성과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국왕의 근왕병(勤王兵)으로 활동하였다. 충청수군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충청 지역을 방어하였고, 1592년 8월 강화도를 거점으로 한강 유역의 일본군을 소탕하였다. 충청수군은 수도인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 양화도전투에 참여하였다.
1593년(선조 26)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이 한성으로 남하하여, 2월 행주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충청수군은 배로 행주산성에 화살을 보급하였고, 행주산성에서 패퇴한 일본군이 강변에 진을 치고 있자 용산창 아래까지 나아가 포를 쏴서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평양에서의 패퇴 이후 부산을 중심으로 주둔했으며, 전라도를 차지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충청수군 소속 수령들인 태안군수, 결성현감, 남포현감, 보령현감 등이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1596년 일본과의 전쟁이 길어지자 이몽학(李夢鶴)[?~1596]이 난을 일으켰고, 충청수군은 홍주목사와 함께 이를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임진왜란 종결 후 논공행상에서 충청수사는 2등 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수군을 통한 남부 해상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충청수군은 한산도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1597년(선조 30) 이순신이 파직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元均)[1540~1597]이 일본군에게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충청수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그 후 1598년에 이르러서야 충청수군은 일정 규모를 회복하였고, 순천왜교성전투(順天倭橋城戰鬪)[정유재란 때인 1598년 10월부터 11월 초까지 전라남도 순천에서 벌어진 전투]와 노량해전[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에도 참전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보령 지역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적었다. 충청수영이 보령에 있었으므로 충청수군을 중심으로 근왕 활동·육상 활동·해전에 참전하여 조선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