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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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寅賓 |
이칭/별칭 | 은경(殷卿),설루(雪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625년 - 이인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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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이인빈 증광문과 을과 급제 및 정언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79년 - 이인빈 송시열을 안치형에 처할 것을 청함.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이인빈 부수찬·장령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91년 - 이인빈 장령으로 재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3년 - 이인빈 헌납을 거쳐 사간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95년 - 이인빈 사망 |
거주|이주지 | 충청남도 보령시 관촌리 |
묘소|단소 | 이인빈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관촌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한산 |
대표 관직 | 정언|수찬|지평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이인빈(李寅賓)[1625~1695]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환국으로 조정에서 배제되었을 때 고향인 충청남도 보령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은경(殷卿), 호는 설루(雪樓)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산해(李山海)[1539~1609], 할아버지는 이경전(李慶全)[1567~1645]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무(李袤)[1600~1684]이며, 어머니는 유희발(柳希發)[1568~1623]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인빈은 충청남도 보령의 전통 있는 세거성씨 한산 이씨 가문의 후손이다. 한산 이씨 이치(李穉)[1477~1507]가 고려 말부터 보령의 유력한 집안이었던 광산 김씨 가문 김맹권(金孟權)[?~?]의 사위가 되면서 보령에 기반을 두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보령을 비롯해 인근의 예산 등지에 확산하였다. 이인빈은 이치의 5대손이다.
이인빈은 당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관료 생활을 하였는데,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급제 후 정언(正言)으로 발탁되었다. 1679년 대사간 최문식(崔文湜), 헌납(獻納) 이화진(李華鎭), 지평(持平) 이한명(李漢命)·배정휘(裵正徽), 정언 김준상(金儁相)과 합사하여, 이유정(李有湞)의 옥사를 빌미로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탄핵하였고, 대신 허적(許積)·민희(閔熙) 등과 함께 송시열을 안치형(安置刑)[조선 시대의 유형(流刑)으로 먼 곳에 보내 그곳에만 머물고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주거를 제한한 형벌]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남인의 영수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와 어울려 이인빈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조지석(趙祉錫)[1648~?]을 탄핵하여 체차[관원(官員)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갈아서 임명함]시켰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면서 관직을 내려놓았다가 기사환국 이후인 1691년에 다시 장령(掌令)으로 기용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정치적으로 허적(許積)[1610~1680]과 가까우면서도 여흥 민씨 민암(閔黯)[1636~1693] 집안과 통혼하는 등 대체로 탁남(濁南)[조선 시대에, 남인(南人) 가운데 허적을 중심으로 한 분파. 숙종 때 남인이 정권을 잡은 뒤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의 죄를 논할 때에 온건한 입장에 서 있었다.]으로 파악된다. 경신환국으로 이인빈의 아버지 이무는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 생활을 한 후에 1684년 고향인 보령 관촌에서 은거하였고, 이인빈도 보령에 머물렀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관촌에 아버지 과암공 이무, 어머니 정경부인 문화 유씨, 아들 소헌 이호근의 묘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