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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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染 |
이칭/별칭 | 무량(無量),무주(無住),대낭혜(大朗慧),백월보광(白月葆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남북국 시대 보령에서 성주사를 중창하고,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창한 승려.
[개설]
무염(無染)[800~888]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신라 말의 대표적인 선승이다.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 법명은 무염(無染)이다. 821년에 당나라에 가서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847년에 웅천주 보령 지역에서 성주사(聖住寺)를 중창하고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활동 사항]
무염은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출가하여 법성(法性)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이후 부석사(浮石寺)의 석등대덕(釋燈大德)에게 화엄을 공부하였다.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대흥성의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였으므로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보령시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 성주산문을 개창하였다. 본래 이곳에는 오합사(烏合寺)란 절이 있었는데, 이를 중창한 것이 성주사였다. ‘성주사’라는 사명은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이 내려준 것으로 그 시기에 「성주사비」가 세워졌다. 무염은 성주사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하였다.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무염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무염의 교화는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았는데, 성주사에 쳐들어온 남포의 도적 떼를 제도해 100명을 출가시켰다. 871년(경문왕 11)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이 왕경으로 초빙하여 국사(國師)에 책봉하였으며, 일시적으로 상주 심묘사(深妙寺)에 주석(駐錫)[승려가 포교하기 위하여 어떤 지역에 한동안 머무름]하였다. 875년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 즉위 이후 성주사로 돌아왔다.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무염은 깨달음에 신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음을 역설하였으며, 무설토(無舌土)와 유성토(有舌土)로 선과 교를 판별하는 선론(禪論)을 가졌다. 1293년(충렬왕 19) 천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무염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다. 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857~?]이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의 명으로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868~944]이 쓴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