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015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종원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의 왕도와 관련된 역사 유적.

[세계 유산의 도시 부여]

부여(扶餘)는 삼국 시대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다. 백제는 538년(성왕 16)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538년부터 660년까지 백제의 왕도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비 천도는 계획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사비왕도는 도성제(都城制)에 기초하여 체계적으로 조영되었다. 사비 지역에는 왕이 거주하는 왕성 구역, 관아 지역, 의례 공간, 거주 공간 등으로 구획되어 많은 관련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 결과 부여에는 백제의 찬란하였던 문화를 보여 주는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백제의 문화유산은 우리나라 고대 문화 연구와 고대 동북아시아 문화 교류의 증거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란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며, 현재 및 미래 세대의 전 인류에 있어 공통적으로 중요한 문화 또는 자연적 중요성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 해당 유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충분한 보호 및 관리 체계를 구비하여야 한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요건 10가지의 기준 가운데 한 개 이상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10개의 등재 기준 가운데 (ⅱ)와 (ⅲ)의 기준을 충족시켰다. 문화유산 등재 기준 (ⅱ)는 “특정 기간과 문화권 내 건축이나 기술 발전, 도시 계획 등에 있어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의 증거”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교류 증거를 보여 주며, 그 교류의 결과로 나타난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의 확산을 보여 주는 유산”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등재 기준 (ⅲ)은 “문화적 전통 또는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인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수도 입지 선정을 통하여 백제의 역사를, 불교 사찰을 통하여 백제의 내세관과 종교를, 성곽과 건축물의 하부 구조를 통하여 백제의 독특한 건축 기술을, 고분과 석탑을 통하여 백제의 예술미를 찾아볼 수 있음.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사라져 간 백제 문화와 역사의 뛰어난 증거”라고 평가하였다.

백제는 1300년 전에 사라진 고대 왕조로 왕조의 멸망과 함께 백제 문화가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300년 전의 문화는 공주·부여·익산의 백제문화유산 속에 함축되어 있다. 도성 유적을 비롯하여 나성, 산성 등의 성곽 유적, 많은 불교 유적과 한국 고대 탑의 유형을 보여 주는 석탑, 다양한 형태의 분묘 유적 등은 1300년 전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사비도성은 한국 고대 도성에 있어서 뚜렷한 계획 도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성곽 유적은 판축 기법이 사용되었고, 성곽 축조에 있어서 특정 시기의 기술적 요소를 보여 준다. 석탑은 기존의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문화적 변천 과정을 보여 주는 양식적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 분묘 유적으로는 백제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굴식돌방무덤이 있는데, 분묘 건축의 변천 과정과 건축 기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백제문화유산에는 백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의 발전 단계를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뛰어났던 건축적, 기술적 측면들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탑, 분묘 유적 등과 같은 건축물, 그리고 백제 금동대향로와 같은 금속공예품 등을 통하여 증명된다. 또한 황룡사지 구층목탑을 건축한 기술자가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였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의 고대 사탑의 건축에 백제 기술자의 참여가 있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즉, 백제문화유산의 탁월한 가치는 국제성과 교류성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부여 지역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 유적으로는 부여 관북리 유적부여 부소산성, 부여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부여 나성 등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8개 가운데 4개가 부여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백제식 왕성 구조의 완성,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여 부소산성]

부여 관북리 유적은 왕궁지로 추정되고 있다. 1982년부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83년도에는 방형의 석축연지가 발견되었다. 1988년 발굴 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백제 시대 도로 유적과 배수 시설이 드러났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8년간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학술 발굴을 실시하여 왕궁의 위치와 규모를 전체적으로 확인하였다. 특히 왕궁의 존재와 관련하여 동서 길이 35m, 남북 길이 18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대형 목곽수조와 수도관 등의 배수 시설을 통하여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저장 시설에서 참외, 다래, 살구, 복숭아, 오이, 수세미 등의 과일과 야채 씨앗이 출토되어 당시 도성에서 거주하였던 백제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조사된 다양한 유구를 통하여 단편적이지만 사비도성에서의 왕궁의 위치와 구조, 그리고 조성 과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도로 구획과 대지 조성으로 이루어진 왕궁의 확장을 통하여 사비도성 도시 계획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삼국 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 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짐으로써 도시 계획의 일부가 파악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여 부소산성백마강 남쪽 높이 106m인 부소산을 감싸며 쌓은 산성이다. 사비 시대 왕궁의 배후 산성으로 평소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였다. 성왕사비로 천도하기 위하여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부소산의 계곡부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의 토축산성이다. 백제 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 토루의 전체 길이는 2,495m이고, 통일 신라 시대에 초축 또는 보완된 테뫼식 산성 토루는 1,576m, 군창터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 토루는 840m로 확인되고 있다.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 반월루, 고란사, 낙화암, 부소산 폐사지, 군창지 등이 있다. 성벽은 판축 기법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백제 토성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부여 부소산성이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축, 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것이긴 하나, 연차적인 조사에 의하여 성벽과 치성 및 특수한 시설과 내부의 여러 가지 양상이 차례로 밝혀져, 우리나라 고대 축성 기술의 박람회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백제 불교문화의 기념비, 정림사지]

부여 정림사지사비 도읍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이다. 발굴 조사 때 출토된 기와편에서 “태평팔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태평 8년은 중국 요나라의 연호로 고려 현종 19년(1028)에 해당된다. 가람 배치 형식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 일금당식 배치로 남으로부터 중문-석탑-금당-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하였다. 사역 안에는 백제 때에 세워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정돈된 형태와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통하여 문화 기술상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장중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갖추고 있어 백제 건축 기술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출토 유물 중 도용(陶俑)은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석탑 기단부에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후 자신의 업적을 새긴 명문이 남아 있어 백제 멸망의 비운을 간직한 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제식 돌방무덤의 완성, 부여 왕릉원]

부여 왕릉원은 높이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중턱에 있다. 모두 7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1915년 2호[중하총], 3호[서하총], 5호[중상총]가 조사되었고, 1917년 1호[동하총], 4호[서상총], 6호[동상총]가 각각 조사되어 내부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7호분은 1971년 보수 공사 중에 확인되었다. 1호분인 동하총은 장방형 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인데, 현실의 네 벽과 천정에 벽화가 있다. 사신도의 양식은 송산리 6호분으로 연결되며, 멀리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2호분인 중하총은 조성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부여 왕릉원은 사비 시기 왕실 무덤군으로 왕실의 묘장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능산리형 돌방무덤은 사비 시기 백제 무덤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부여 왕릉원에 인접하여 부여 능산리 사지가 있다. 부여 능산리 사지는 창건 연대가 분명하여 삼국 시대의 역사, 건축,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도성제 시행의 전모를 보여주는 부여 나성]

부여 나성사비도성을 에워싼 토축의 외성으로 평양의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의 하나이다. 성에는 사방에 문지가 있고, 축성 연대는 성왕 대[523~554]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성벽은 부여 부소산성의 동문터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를 거쳐 금강 변까지 이르러 총 6.6㎞에 이른다.

나성 안에는 백제 시대 왕궁을 비롯하여 관아, 민가, 사찰, 상가 및 수도 수비를 위한 방위 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부, 중부, 전부, 하부, 후부의 5부를 두었다. 부여 나성부여 청산성, 부여 청마산성과 함께 왕도의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 시설이었으며, 사비도성의 방어 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 나성은 중국 도성에 보이는 외곽의 체계가 백제로 수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경우 북위의 낙양성에서 외곽이 일부 확인되지만 부여 나성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 유산 역사 도시 부여의 의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 시대 웅진-사비 시기의 왕도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왕궁 시설과 조경 시설, 사상적 발전을 보여 주는 종교 시설과 고분 유적, 군사 체계를 보여 주는 관방 유적, 도성 내 생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건물지, 당시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각종 공예품 등이 종합적으로 확인된다. 즉, 고대 국가의 왕도로서 갖추어야 할 운영 체계와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를 전체적으로 갖추고 있다. 특히 부여 지역의 사비도성은 도성제에 기초하여 계획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발굴 조사를 통하여 당시 모습들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제정된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여 부여는 우리나라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명실상부한 백제고도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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