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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07
한자 李夢鶴-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6년 7월 6일연표보기 - 이몽학의 반란군이 홍산현 공격
종결 시기/일시 1596년 7월 11일 - 이몽학이 도주 중 반란군에 의해 참수
성격 사건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중인 1596년에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 등이 역모를 일으키자 충청·전라 지역민들이 크게 호응하였으나 진압된 사건.

[개설]

이몽학(李夢鶴)[?~1596]은 왕실의 서얼 출신으로 임진왜란 중 민심이 이반된 틈을 이용해 모속관(募粟官)[식량을 모으는 임무를 맡은 관리] 한현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에서 반란군을 규합하였다. 1596년 7월 6일 반란군은 홍산현을 습격하고 임천군(林川郡), 정산현(定山縣), 청양현(靑陽顯), 대흥현(大興縣)을 함락한데 이어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홍주 목사 홍가신의 철저한 방어 소식에 홍주(洪州)를 포기하고 덕산으로 퇴각하였는데, 반란군 진영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한현은 홍주에 주둔하던 중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며 반란은 진압되었다. 난을 진압한 홍가신은 청난공신 1등으로 책록되었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 책록되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장기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은 비참해지고 조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도 늘어났다. 이몽학의 난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 벌어진 것이었다. 당시 전쟁의 피해가 극심한 가운데 흉년이 계속되었고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고자 각 지역에서는 인력을 동원해 산성을 수축하고 있었다. 왕실의 서얼 출신으로 부친에게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를 전전하던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호응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민중의 소망 때문이었다.

[경과]

이몽학임진왜란 중 모속관 한현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한현과 함께 홍산의 무량사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를 훈련하였다.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군 규합에 열중했다. 이때 마침 한현이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로 떠나며 이몽학에게 먼저 거사하도록 하였고, 내포(內浦)로부터 상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1596년 7월 6일 이몽학 일당이 야음을 타 홍산현 임천군을 습격하고 7일에는 정산현, 8일에는 청양현을 함락하였다. 7월 9일에는 대흥군을 함락하니 고을 수령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해 항복하거나 도주하고 이민(吏民)들도 모두 반군에게 복종하였다. 부여 현감 허수겸은 투항하였고 서산 군수 이충길은 반란군을 돕기까지 하였다. 이몽학은 대흥을 함락한 날에 홍주를 침범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천안 지역의 상황은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지만, 충청도 일대 사람들이 이 반란에 호응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천안 지역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결과]

한편, 홍주 목사 홍가신은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임득의 등과 많은 무사를 모아 홍주성의 수성 계획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이몽학은 홍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1596년 7월 11일 새벽 덕산을 향해 달아났고,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관군은 반란군 진영을 혼란하게 만들며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이때 한현은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홍가신의 진군으로 패주하다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으로 책록되었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다.

선조는 동지의금부사 윤승훈(尹承勳)을 지금의 천안 북부 지역인 직산(稷山)으로 보내어 죄인들을 심문해서 경중을 가리도록 했고 꼬임을 당했거나 위협을 못 이겨 가담한 어리석은 백성들은 가벼운 법을 적용해서 석방했다. 서울로 송치된 자는 100여 명이었고, 사형에 처한 자들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연좌를 적용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드러난 사회적 모순이 극심했고, 민심의 이반 현상이 상당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안 지역에서 이몽학의 반란군에 얼마나 호응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충청도에서 반란군이 승승장구한 것은 이 지역의 민심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경기와 충청의 접경이며 호서의 관문이 되는 직산 고을에서 죄인을 심문하였던 것을 보더라도 이몽학의 반란에 충청인들이 얼마나 많이 관여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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