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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09
한자 李适-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24년 1월 24일 - 이괄의 난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4년 2월 11일 - 인조가 공주로 피난길을 떠나며 직산을 통과하고 천안군에서 머무름
종결 시기/일시 1624년 2월 15일 - 이괄의 난 진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4년 2월 19일 - 인조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직산에서 하루를 머무름
성격 사건

[정의]

조선 후기 인조반정 직후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괄이 내란을 일으키자 인조의 피난 행렬이 천안을 지난 사건.

[개설]

1623년(인조 1) 서인 세력은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33인을 등위로 나누어 책록하였다. 그중 2등에 녹훈된 이괄(李适)[1587~1624]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이에 1624년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어 직산과 천안을 거쳐 공주에 이르렀으며, 다시 환궁할 때에는 직산에 머물렀다. 이괄의 군대는 1만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영변에서 남하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장만(張晩) 휘하의 관군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1623년(인조 1) 서인 세력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33인은 정사공신에 녹훈되고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이때 이괄은 반정 계획에 늦게 참여하였다 하여 2등에 책록되고 아들과 아우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좌천되어 영변에 머물게 되자 구체적인 반란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는 관군의 병력이 대단치 않고 전면적인 동원도 어려우리라는 점을 계산해 도사를 죽이고 순변사 한명련과 함께 1624년(인조 2) 1월 24일에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1만여 명의 반군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고 형조 판서 이시발과 대사간 정엽을 부사, 이수일을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삼아 반군을 토벌하였다.

토벌군과 장만의 추격군이 서흥(瑞興)에서 합류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으나 반군은 이를 돌파하고 개성을 거쳐 벽제(碧蹄)까지 이르렀다.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떠나자 반란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堤)를 추대하였다.

인조가 공주로 피난하는 길은 천안 지역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2월 11일에 대가가 직산(稷山)에 이르니 충청 관찰사 이명준(李命俊)이 수령 10여 인을 거느리고 맞이하였고, 운봉 현감(雲峯縣監) 황일호(黃一皓)가 군사 700명을 거느리고 왔다. 인조는 말을 멈추고 이들을 불러 외유하였으며 해질 무렵에는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렀다. 12일에 천안에서 관군이 승리했다는 첩보를 들었지만 머물며 형세를 살피기로 하고 13일 공주로 향하였다. 공주에서 다시 서울로 환어할 때에도 2월 19일에 직산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결과]

반란군은 장만 휘하의 관군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이천으로 도망하였고 결국 1624년 2월 15일 아침 반란군 기익헌·이수백 등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면서 난은 진압되고 말았다.

천안 출신의 지계최(池繼崔)는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서로초모별장이 되었으며, 당시 이괄은 부원수로 영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이괄이 강적(姜適)을 보내 지계최에게 반란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으나 지계최는 오히려 강적의 목을 베었다. 그후 장만을 만나 정충신(鄭忠信), 남이흥(南以興), 이수일(李守一) 등과 함께 적을 물리치고 후에 3등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서인 정권은 호위청 군관의 수를 배로 늘리고, 어영청과 총융청을 설치하는 등 군사력의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도성 부근에 피신처가 없어 공주까지 피난해야 했던 사실을 들어 남한산성의 축조를 신속하게 진행하기도 하였다. 천안 지역은 서울에서 호남으로 가는 대로(大路)에 위치하였고, 이 같은 지리적 특징은 인조의 피난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가장 빠르게 공주로 향하는 길이 직산에서 천안을 거치는 노선이었던 것이다.

이괄의 난 이후 기내(畿內) 군사력의 정비가 일부 이루어졌지만, 서북로를 비롯한 지방군의 정비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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