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31 |
---|---|
한자 | 廣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 지역의 광산.
[개설]
천안 지역은 고려 말부터 금의 산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직산 일대는 차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상당한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었다. 직산 금광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고려 말 1277년(충렬왕 3)이었다. 원(元)나라는 고려를 산금국(産金國)이라 하여 금을 수탈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채굴해 갔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명나라에서 금은을 공물로 요구할 것을 두려워 1429년(세종 11)에 전국의 금은 광산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관원들이 상납을 받고 밀채를 묵인하거나 권세 있는 궁장(宮庄)에서 채광을 하여 효종 때에 와서는 금점(金店), 은점(銀店)이라는 관청을 두어 세금을 거두었다.
[일제 강점기 직산 금광]
일제는 천안 지역의 광산이 이권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대한제국 정부와 1900년 광산 채굴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끈질긴 교섭의 결과로 일본 공사가 1900년 7월에 고종 황제로부터 직산 금광 특허 응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8월 16일 궁내부 대신 서리 윤정구(尹定求)와 일본의 삽택영일·천야총일랑 광산 조합의 대리인 좌좌목청마(佐佐木淸麿)와의 사이에 ‘직산 금광 채굴 합동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인의 불법 침탈이 결국은 합법화되고 말았다.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인 소유의 조선 중앙 광업소가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 설립되었다. 조선 중앙 광업소의 직산 광산은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미국인에게 양도되었다. 직산 광산은 그 규모가 조선 내에서도 평안남도 운산 광산 다음 가는 규모였다. 그런 만큼 많은 인부들이 모여들어 광산촌을 형성하였고, 양대리에 광명 학교가 세워지는 등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다.
당시 직산 금광에 종사하던 광부의 수는 광산의 성쇠에 따라 증감이 있지만 대체로 2,000명 이상이었다. 산금고(産金高)는 대체로 1년 평균 약 70관[262.5㎏] 내지 80관[300㎏]으로, 충청도 전부의 산금고 중에서 1/2 이상을 점할 정도였으며, 그 가치는 30만 원 이상에 달하였다.
[사금광의 개발]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청수동 수도산에 광산이 개발되어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광석을 나르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가동되었다고 한다.
또한 천안 지역에는 석금뿐만 아니라 사금 광산이 다수 존재하여 천안 일대에는 크고 작은 광산이 개발되었다. 성환 광업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사금을 채취하였다. 그리고 성거읍에도 천흥 광산(天興鑛山)이 설립되었고, 입장 지역에도 중앙 광산(中央鑛山)이 설립되었다. 이들 광산은 비교적 규모가 큰 광산으로,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반면 규모가 작은 사금광은 주로 조선인이 운영하였다.
입장면 구석에서부터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천안시 일원의 들판은 파헤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중 직산면 시름세들이 가장 산금량이 많았다. 이 시름세 사금광에서 한국인으로 성공한 이가 김봉서(金鳳瑞)였다. 김봉서는 젊어서는 금광의 막노동 인부로 일하다가 덕대, 연상으로 발전하여 이 지역의 금광왕이 되었다. 그는 사금으로 돈을 벌자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줘서 현재 부대동 1호 국도변에 김봉서 시혜 기념비(施惠記念碑)가 서 있다
성환 광업 주식회사에서는 풍부하게 매장된 사금에 주목하여 배 모양의 최신 장비를 도입하여 채굴하였다. 일명 금배라고 불렀다. 직산 지역은 금이 매장되지 않은 들이 없기 때문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파내려갔다. 금배는 길이 32m, 폭 12.6m, 높이 26m의 거대한 선체로 하천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장비였다. 금배는 광복 전까지 가동되다가 광복 후 해체되었는데, 1대는 직산면 상덕리에 있었으며, 1대는 안궁리에 있었다.
[현황]
일제 강점기 성황을 보였던 천안 지역의 광산은 광복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제 강점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금맥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광복 이전까지 성업 중이던 성거읍의 천흥 광산이나 입장면의 중앙 광산은 그 후 점차 채금양이 줄어 1964년 산금양은 중앙 광산에서만 연 7.9㎏이었다. 1980년 2월 1일에 등록된 천보 광산이 입장과 성거의 두 광구에서 연 산금량 33.6㎏의 실적을 올렸다. 그 후 1983년에 27.4㎏, 1984년에 10.2㎏, 1985년에 8.6㎏로 점차 산금양이 감소하다가 1990년대 이후 전혀 채금을 하지 않고 폐광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