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515 |
---|---|
한자 | 梅峰敎會 |
이칭/별칭 | 지령리 교회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수 |
설립 시기/일시 | 1908년 - 지령리 교회 설립 |
---|---|
개칭 시기/일시 | 1966년 - 지령리 교회에서 매봉 교회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지령리 교회 -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
현 소재지 | 매봉 교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38-6 |
성격 | 교회|감리 교회 |
설립자 | 선교사 스웨러 |
전화 | 041-564-1813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
[개설]
매봉 교회는 천안 동부 지역에서 최초의 교회로 설립되어 구한말 국채 보상 운동과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교회가 불태워지고 결국은 강제 폐쇄 조치된 교회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옛 이름이 지령리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지령리 교회라고도 불렀다.
매봉 교회가 위치한 곳은 옛날 한양에서 여주, 이천을 거쳐 충청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 충청도 지역을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주로 이 길을 통해 공주로 갔다. 따라서 자연히 지령리는 공주로 내려가던 선교사들이 지나던 길에 들러 선교하는 곳이 되었고 19세기 말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1898년 당시 충청도 주재 선교사였던 케이블(Elmer. M. Cable)이 유빈기의 집에서 기도회를 시작함으로 교회의 기틀을 놓고 1901년 이천 덕돌 교회 속장인 박해숙이 순회 전도를 하러 와서 많은 신자가 생겼다.
[변천]
1898년 선교사 스웨러(Wilbur. C. Swearer)에 의해 설립된 충청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의 기도처는 구한말의 민족적 수난기에 민족을 위해 앞장섰다. 그 여파로 1907년 교회당이 일본 경찰에 의해 전소되기도 했다.
이에 1908년에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설립하고, 1910년에 진명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웠으며, 1919년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시 유중권, 조인원 등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가담했다가 많은 교인들이 순국하고 유관순도 이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후 교회는 일본 경찰의 철저한 감시 속에 핍박을 받다가 결국 1932년에 폐쇄 조치를 당했다. 이후 1966년에 다시 재개척하여 이듬해 이화 여자 고등학교의 지원으로 기념 교회가 세워지면서 매봉 교회가 되었고, 1998년에 기독교 대한 감리교단의 지원으로 다시 기념 교회를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사업]
매봉 교회는 설립 초기에 국가적 상황에 따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국채 보상 운동[1907년], 진명 학교 설립[1910], 독립 만세 운동 주도[1919] 등이 그것이다. 그 이후에도 정기적인 만세 운동 기념 예배와 유관순 추모 예배를 거행하고 있다.
[현황]
유관순 열사 생가와 담장을 나란히 두고 있는 매봉 교회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지하 1층에는 유관순 열사 전시관이 있고, 1층에는 교육관과 사택, 2층에는 예배 공간이 있다.
2012년 현재 매봉 교회는 지역적 상황에 의해 평범한 농촌 교회로 전락해서 간신히 교회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100명 미만의 성도에 그나마도 대부분 노인들이다. 지금은 기념 교회로 건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천안 동부 지역 최초의 교회이자 만세 운동으로 유명한 유관순의 고향 교회이기도 한 매봉 교회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민족을 위해 일해 온 교회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교회이다. 지금은 기념 교회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정부 지원은 매우 빈약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