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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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安幼稚園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사직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목 |
개교 시기/일시 | 1922년 6월 18일 - 천안 유치원 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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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천안 유치원 - 천안읍내 감리교당 |
현 소재지 | 천안 유치원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사직동 |
성격 | 유아 교육 기관 |
설립자 | 박원백|성원경|서상규|김병제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 있었던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사회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아동 교육이 근본이라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인생의 우열과 선악을 구별하는 기초는 아동 교육에 달려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였다.
[변천]
박원백(朴元百), 성원경(成元慶), 서상규(徐相奎), 김병제(金秉濟) 등은 1922년 3월 11일에 유지 인사 30여 명과 더불어 천안읍내 감리 교회에서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설립 준비 위원으로 박원백, 서상규, 성원경 등 18명과 찬성원을 선정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보육료와 교회의 보조로 경상비에 충당하며, 찬성원 기부금으로 임시비에 충용하기로 하고 임시비는 600원 이상 마련할 것을 결의하였다. 현장에서 모금된 의연금은 428원에 달했다. 같은 해 6월 18일 개원하였다.
1927년까지 졸업생 20여 명을 배출하는 등 천안의 유아 교육 중심 기관으로 발전하였고, 최경환(崔景煥), 성원경 등의 열성으로 재학생은 4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경제적인 불황에 따라 유치원 유지도 문제가 되었다. 열성적인 후원자인 노제호(盧濟鎬), 지병룡(池秉龍), 성원경 등이 천안을 떠나고,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의 지원금 등의 격감으로 인해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였다. 동아 일보 천안 지국 기자는 두 번에 걸쳐 유지들 분발을 촉구하는 한편 지역민의 적극적인 후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부활된 천안 유치원의 유치원장은 천안 기독 교회 전도사, 천안군 반탁 위원회장 등을 역임한 천안 국민학교 후원 연합회 회장인 윤계상(尹桂相)이었다.
1922년 6월 개원 초기에는 원장 1명, 원감 1명, 보모 2명에 원아 수 20여 명이었다. 1927년에는 교육 시설 확충과 더불어 원아 수가 4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재정적인 곤경과 아울러 원아 수도 감소된 것으로 보인다.
[교육 활동]
개원 당시 원장은 박원백 목사, 원감 성원경, 보모 이자성(李慈成)과 민정수(閔晶洙) 등이 있었다. 교과 과정은 창가, 유희, 주악, 체조 등으로 구성되었다. 입학 자격은 4세 이상 7세 미만으로 규정하였다. 천안 청년회와 청년 기독교 청년회 후원으로 개최된 음악 대회에는 예산 청년회 양악대 특별 연주와 서울에서 성악가 등이 참석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천안 주일 학교 합창대와 공동으로 출연한 행사는 지역민의 유치원 교육에 대한 관심 고취와 아울러 정서 함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