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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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田里 |
영어음역 | Seokjeon-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영복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석전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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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49년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석전리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로 개편 |
법정리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4.0㎢ |
가구수 | 3,352가구 |
인구[남/여] | 8,501명[남 4,226명/여 4,275명]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석전리는 9개의 자연 마을과 10개의 행정리로 나누어져 있다. 석전 1리에 고지[고제(古堤), 고정(古亭)] 마을, 석전 2리·석전 7리·석전 8리에 만치골[만취리(萬取里), 후문(後門), 기지촌(基地村)] 마을, 석전 3리·석전 5리·석전 9리에 귀바우[구바우, 구암(九岩), 이암(耳岩)] 마을, 관터[관기(館基)] 마을, 웃돌밭[상석전(上石田), 금옥(金玉)] 마을, 새터[신기(新基)] 마을, 석전 4리·석전 6리에 나루미리[배터, 석전진두(石田津頭)] 마을, 굴동네[한바] 마을, 여우골[호동(狐洞), 여의리(如意里)] 마을 등이 있다.
[명칭 유래]
석전리에 아홉 바위 등 돌이 많아 돌밭[石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고지 마을은 이 마을에 있는 고정 서당(古亭書堂)에서 유래되었다. 만치골 마을은 마을에 산신당이 있었는데 여기서 정성을 드리면 만사가 성취된다고 만치골이라 했고, 한편 미군 기지의 후문이 생기면서 훗문 또는 기지촌이라 불렀다. 귀바우 마을은 마을 앞 남쪽에 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큰 바위가 아홉 개 있다고 구바우라고도 했다.
관터 마을은 마을 안에 수향역(水鄕驛) 터와 남쪽에 역관(驛館) 터가 있었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졌고, 웃돌밭 마을은 석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낙동강 변 모래가 옥(玉)같이 맑고 깨끗하여 금옥이라 불리기도 했다. 새터 마을은 석전리 중심 마을인 귀바우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 또는 신기라 불렀다. 나루미리 마을은 마을에 낙동강을 이용한 배가 닿기에 알맞아 나루터가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굴동네 마을은 1904년 경부선 철도 공사 때 인부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곳이라 일본어로 한바[飯場]라 했고, 굴 앞에 있는 마을이라 굴동네라 불렀다. 여우골 마을은 마을 뒷산에 여우가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석전리는 약 400년 전 선조(宣祖) 초에 광주인 이광복(李光復)이 지천면 상지에서 옮겨 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웃돌밭 마을은 약 400년 전 벽진인(碧珍人 ) 이충민(李忠民)이 달오 마을에서 옮겨 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만치골 마을에도 1850년경 벽진 이씨(碧珍李氏)가 옮겨 와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칠곡군 왜관읍 파미면(巴彌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관동(館洞)·상석(上石)·고제(古堤)·이동(耳洞) 등의 일부를 병합하여 석전동(石田洞)이라 하고 칠곡군 왜관면에 편입하였고, 1949년 왜관면이 왜관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자연 환경]
석전리는 남쪽으로 왜관리와 접하면서 북쪽으로 작오산[鷓鴣山]을 등지고 있다. 왜관에서 다부리로 통하는 지방 도로가 동·서로 중앙을 지나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에 다다른다. 마을에서 미군 군수 기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전체의 반에 이른다.
[현황]
2013년 12월 현재 석전리의 면적은 4.0㎢이며, 인구는 3,352가구, 8,501명으로 남자가 4,226명, 여자가 4,275명이다. 전통 한옥이 많은 반촌(班村)이었지만 자연 마을 대부분이 미군 보급 기지로 편입되고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음식점 등 유흥업소 개업과 아파트 단지 등 공동 주택 조성으로 전통 마을의 생활 양식도 빛을 잃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