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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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坪里窯址 |
영어의미역 | Kiln Site in Jungwon Changpyeong-ri |
이칭/별칭 | 해당사항 없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산6-2|산1|산11|산19|산18|산15-1|92|산53|산43 일대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김약수 |
성격 | 청자가마터|자기가마터|옹기가마터|도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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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고려시대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산6-2, 산1, 산11, 산19, 산18, 산15-1[중산골]|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92, 산53[사기점]|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산43[대백] 일대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일대에 있는 고려·조선시대 청자·자기·옹기가마터.
[개설]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에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청자·자기·옹기가마터 10기가 확인됨에 따라 ‘창평리 요지’라고 불린다. 창평리 요지의 조성 시기와 청자·자기·옹기 수급에 관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 지표 조사에서 청자·자기·옹기편, 벽체편 및 슬러그, 도침, 청자·자기·옹기편들이 박혀 있는 절토면 유구로 볼 때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업이 행해졌던 유적들로 추정된다.
[위치]
창평리 요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청자·자기·옹기가마터 10기가 위치하고 있는데, 정확한 소재지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산6-2, 산1, 산11, 산19, 산18, 산15-1, 92, 산53, 산43번지 일대이다.
창평리 요지①은 창평리 산6-2번지 중산골마을에 소재하는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로서 창평리 일대의 요지 중에서 최고 상단에 해당한다. 창평리에서 중산골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1km 정도 가면 도로 좌측 편에 작은 연못이 있고 더 올라 가면 큰 계곡과 작은 계곡이 만나는 곳에서 좌측 계곡을 따라 약 200m 거리에 위치한다.
창평리 요지②는 창평리 산1번지 중산골마을에 위치하는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로서 창평리 일대 요지 중에서 상단부에 속하며, 창평리 요지①에서 남동쪽으로 약 20m 거리에 있다. 창평리에서 중산골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가면 도로 좌측 편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요지는 연못에서 북쪽 계곡을 따라 약 200m 거리에 위치한다.
창평리 요지③은 지천면 창평로 415[창평리 산11번지] 중산골마을에 위치하는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로서 창평리 일대의 요지 중에서 상단부에 속하며, 창평리 요지②에서 남동쪽으로 약 80m 거리에 있다. 창평리에서 중산골마을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가면 도로 좌측 편에 작은 연못이 보이고 여기에서 북쪽 계곡을 따라 더 올라가면 큰 계곡과 작은 계곡이 만나는데, 좌측의 작은 계곡을 따라 좀 더 오르면 좌측으로 더 작은 계곡이 나 있다.
창평리 요지④는 창평리 산19번지 중산골마을에 위치하는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로서 창평리 요지③에서 남서쪽 200m 거리에 있으며, 창평리 요지⑤에서 북동쪽으로 200m 거리에 위치한다. 창평지 북단에서 계곡 옆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가면 좌측 편으로 극락사로 진입하는 시멘트 길이 나온다. 시멘트 길로 들어서서 계곡을 건너자마자 우측의 계곡 옆 좁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작은 연못이 나오는데, 유적은 연못의 제방 좌측 산록에 해당한다.
창평리 요지⑤는 창평리 산18번지 중산골마을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자기가마터로서 창평리 요지④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m 거리에 있으며, 창평리 요지③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m 거리에 있다. 창평지 북단에서 계곡 옆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가면 좌측편으로 극락사로 진입하는 시멘트 길이 나온다. 시멘트 길로 들어서서 계곡을 지나 극락사로 올라가면 도로 우측 편에 작은 곡부가 형성되어 있고 도로 우측 절개지와 곡부에서 가마의 벽체편 및 슬러그와 함께 자기편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된다.
창평리 요지⑥은 창평리 산 18번지 중산골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자기 가마터로 창평리 요지⑤에서 동쪽으로 180m 정도 거리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약 200m 거리에는 옹기 요지인 창평리 요지⑦이 위치하고 있다. 창평지 북단에서 계곡 옆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면 왼쪽으로 극락사로 진입하는 시멘트 길이 나온다. 갈림길 오른쪽에 유구가 있다.
창평리 요지⑦은 창평리 산 15-1번지 중산골마을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가마터로서 북쪽 약 200m 거리에 창평리 요지⑥이 있다. 창평지 북단에서 계곡 옆 도로를 따라 400m 정도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면 도로 오른쪽으로 곡부가 형성되어 있고 곡부 하단부의 절개지에서 재층이 확인된다.
창평리 요지⑧은 창평리 산 50번지 사기점마을에 위치한다.
창평리 요지⑨는 지천면 창평로 315-6[창평리 92번지] 사기점마을에 위치하는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로서 창평지 제방 왼쪽의 들꽃농원 내에 있다.
창평리 요지⑩은 창평리 산43번지 대백마을에 위치하는 역사시대 미상의 가마터이다. 창평리 대백마을 전방 약 500m 거리에는 우측으로 심천리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 있고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유적은 이 계곡 초입의 북쪽 능선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현황]
창평리 요지는 모두 10기로서 고려시대 가마터 6기, 조선시대 가마터 3기, 시대미상 1기 등이다.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창평리 요지①은 현재 과수원 일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요지 단지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잔존유구는 발견되지 않으나 계곡이 확장되면서 절개된 사면에서 재층이 발견된다. 이 재층에서 다량의 목탄과 함께 자기편이 확인된다.
창평리 요지②는 유구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으나 계곡 옆 등산로 위에 가마의 벽체편 및 슬러그와 함께 청자편이 확인된다. 계곡확장으로 인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되는 유물은 청자편과 상감자기편도 보인다.
창평리 요지③은 유구는 확실치 않으나 계곡 옆 사면에 요의 벽체편 및 슬러그와 같이 자기편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된다. 수습되는 유물은 해무리굽의 청자편과 초벌구이 한 자기의 완형도 있으며, 상감청자편도 보인다.
창평리 요지④ 주변에는 가마의 벽체편 및 슬러그와 함께 폐기된 자기편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수습되는 유물은 대부분 청자 저부편이며 초벌구이를 한 자기편도 있다.
창평리 요지⑤는 도로를 개설할 때 가마의 유구가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도로 맞은편 아래에도 자기편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가마일 것으로 추정된다.
창평리 요지⑥은 아스팔트 도로를 개설하면서 가마의 하단부가 파괴되었다. 가마는 능선방향에서 45도 방향으로 시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계곡부와 절개지에 벽체편 및 슬러그, 도침, 자기편 등이 도처에 깔려 있다.
창평리 요지⑦의 재층은 그 범위가 좁은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궁이부일 것으로 추정되고, 주변으로 옹기편이 다량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옹기가마터로 판단된다. 이 유적의 서편 도로 건너편 과수원 일대는 이 유적과 관련될 것으로 보이는 유물산포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창평리 요지⑧은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로서 창평지 동편 골짜기 상단부에 해당한다. 이 일대의 다른 요지와는 떨어져 독립되어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중산골의 큰 계곡을 중심으로 좌우의 작은 계곡과 곡부마다 요지가 들어섰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 창평지가 축조되면서 계곡 하단부의 요지는 수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은 창평지 북단에서 저수지 외곽의 좁은 길을 따라 500m 정도 들어가면 밭을 개간하면서 생긴 절개면에 요의 벽체편 및 슬러그와 자기편, 갑발 등이 다량으로 확인된다. 특히 갑발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저수지 건너편 즉, 제방 옆 들꽃농원의 창평리 요지⑨와 성격이 유사한 유적이라고 추정된다. 이곳에서 남쪽의 능선을 넘으면 창평지의 동쪽 계곡 중 가장 큰 계곡이 있는데, 이 계곡 남쪽 사면에 고려시대 분묘가 위치하고 있다.
창평리 요지⑨는 창평지 일대의 요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들꽃농원의 마당으로 들어서면 우측의 절개된 산의 사면에 요의 폐기된 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곳 마당은 원래 밭으로 경작되었다고 하는데, 경작 당시 요의 절반 정도가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유구는 이 마당 남쪽의 민가 뒷 담장까지 연결되어 있다. 수습되는 유물은 청자가 대부분이며 벽체편 및 슬러그, 도침, 갑발 등이다. 자기편 중에서 해무리굽이 발견된다.
창평리 요지⑩ 유적은 계곡 초입의 북쪽 능선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 채의 민가가 있다. 이 민가 끝집인 송군익 가옥에서 산으로 오른 등산로가 있는데, 이 등산로 초입에 요의 벽체편과 슬러그가 땅속에 박혀있다. 박혀있는 형태로 보아 유구가 훼손되지 않고 요의 원형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창평리 요지는 모두 10기로서 고려시대 가마터 6기, 조선시대 가마터 3기, 시대 미상 1기 등이다. 이와 같이 한 지역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청자·자기·옹기가마터 등 다양한 가마터가 유존하는 것은 매우 드문 유적이다. 지표 조사에서 청자·자기·옹기편, 벽체편 및 슬러그, 도침, 청자·자기·옹기 편들이 박혀 있는 절토면 유구로 볼 때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업이 행해졌던 유적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