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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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林團-長書運動 |
영어의미역 | Confucians Group |
이칭/별칭 | 제1차유림단운동,유림단파리장서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19년 3·1운동 후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장석영을 포함한 유림계가 파리 강회회의에 독립을 요구한 운동.
[개설]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유림(儒林)계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137인이 서명한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향하였고, 국내에서는 서명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다.
[발단]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영남 유림은 유림계가 참여하지 못했음을 크게 한탄하였다. 이에 김창숙 등은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빠졌으니 국제 활동의 사명은 유림에서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 여론을 조성하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과]
우선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은 서명 작업과 활동 자금을 준비하였고, 김창숙 등은 전국을 대상으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22일 김창숙은 137인의 서명을 받아 이루어진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출국하여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김규식이 민족 대표의 자격으로 파리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과]
한편 김창숙이 상해로 건너 간 뒤 4월 2일 성주 장날의 만세시위 운동으로 장석영·송준필·성대식 등이 구속되면서 독립청원 운동은 일경(日警)에 탐지되었다. 이에 서명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어 4월 13일에는 곽종석 등도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5월 15일 공판에서 곽종석·장석영은 2년, 송준필 1년 6월, 성대식 1년의 징역을 각각 언도받았다.
제1차 유림단운동에 참여한 칠곡 출신은 기산의 장석영이 서명자로 기록되어 있다. 장석영은 곽종석·김창숙 등과 협의하여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며, 4월 2일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 후 1925년 경북 지역의 제2차 유림단운동이 있을 때도 영남 대표로 활동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1차유림단운동은 3·1독립선언서에서 빠진 유림계가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한 독립청원 운동이었다. 운동은 우리의 독립을 세계열강에 의존하는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전통 유림의 한계를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 이래 망국 책임론으로 위축된 유림계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