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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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錫英 |
영어음역 | Jang Seokyeong |
이칭/별칭 | 장지영(張之榮),순화(舜華),중범(仲範),추관(秋觀),회당(晦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성주군|대구광역시|중국 만주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윤오 |
성격 | 유림 대표|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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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각산동 588[현 기산면 각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851년 10월 24일 |
몰년 | 1926년 7월 17일 |
본관 | 인동 |
대표경력 | 국채보상운동 경북지방보상회장 |
[정의]
일제강점기 칠곡 출신의 유림(儒林) 대표 독립운동가.
[개설]
1851년(철종 2) 10월 24일에 칠곡군 약목면 각산동[현 약목면 각산리]에서 전 형조참판(刑曹參判) 장시표(張時杓)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 이진상(李震相)에게 사사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지방보상 회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전국 유림들의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 일명 巴里長書)를 초안하고 성주(星州)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활동사항]
1905년(광무 9)에 을사조약을 맺게 되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유생 3백여 명을 규합하여 ‘청참5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1907년(융희 1)에 거국적인 국채보상운동 때, 지방보상 회장으로 추대되어 금연 운동과 의연금 모집을 주도하였다. 1912년 3월 3일~6월 9일 동안 만주와 노령(露領) 지역 일대를 순력하며 독립운동 적지를 물색하고 한인 이주 실상을 견문·기록한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하여 귀중한 독립운동 사료를 남겼다. 『요좌기행』에서는 이주 적지를 요동 쪽의 서간도(西間島)로 보았다. 1919년 들어 3·1운동과는 별도로 김창숙(金昌淑) 등 전국의 유림들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아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내기로 하였다. 청원서는 파리·총독부·국내 발송용 등 5개 본으로 나누어, 장석영은 총독부 전달용의 초안을 작성하고 유림 대표 137명의 1인으로 서명하였다.
한편 전국으로 번진 만세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당시 성주군 월항면 안포동에 거주하던 장석영은 성주의 유림들과 함께 기독교도와 연대하여 성주 장날인 4월 2일에 거사키로 하였다. 당일 오후 1시 시장에 모인 군중들의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다급해진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생기고 유림들과 함께 장석영도 체포되었다. 조사 중에 파리장서 내막이 알려졌으나, 노출된 곽종석과 장석영. 송준필 등 16명만 재판에 회부되고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장석영은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복심에 공소하였다. 다음 달에 상해에서 국내로 발송한 독립청원서가 각 향교에 도착한 것이 발각되면서 서명인 전원이 수감되었다. 이 중에서 곽종석은 병보석 되었으나 8월 24일 순국하고, 김복한(金福漢)과 하용제(河龍濟)는 옥사하였다. 그 외 인사들은 일본의 회유책으로 미결 3개월 간의 옥고 뒤,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같은 해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장석영 등 4인은 증빙 불충분으로 원판결을 취소하고 무죄가 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9년 3월 ‘회당장선생사적비(晦堂張先生事蹟碑)’를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 세우고, 매년 광복절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