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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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月攻防戰 |
영어의미역 | Offensive and Defensive Battle of Septembe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동명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성격 |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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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9월 4일 |
종결연도/일시 | 1950년 9월 22일 |
[정의]
1950년 9월 칠곡군 낙동강 방어선에서 벌어진 북한군과의 전투.
[개설]
북한군이 9월 4일 무렵부터 전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펼치자 유엔군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될 것에 대비하여 설치하였던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선]으로의 철수, 나아가 ‘망명정부의 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9월 6일 국군 제8사단이 방어하던 영천이 점령됨으로써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작전지역이 동서로 양분되고, ‘대구-안강-포항’으로 연결되는 국군의 유일한 동서 횡단로가 차단되어 대구와 경주가 동시에 위협받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를 웅변하던 9월 7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전면 철수를 고려하라는 극비의 긴급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구상이 미국 고위층의 결정은 아니었지만 예정된 인천 상륙작전의 취소까지도 고려해서 내린 지시가 있었다. 한편 9월 9일에 김일성은 전쟁이 “아주 치열하고 결정적인 단계”에 도달했으며, 적을 3개 전선에서 몰아붙이고 있다고 호언하였다.
그러나 9월 10일 이후 영천에서 인민군을 격퇴한 것을 계기로 유엔군은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고, 동시에 유엔군 및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하게 되면서 전면 철수 고려는 없던 일로 되었다. 그리하여 9월 13일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로 발표하였다. 나아가 9월15일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은 지금까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튿날 워커의 병사들은 부산 방어권을 돌파하여, 인천에 상륙한 군대와의 연계를 위한 경쟁을 시작하였다.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은 북쪽으로 후퇴를 시도하였으나 상당 병력은 남쪽에 남게 되었다. 9월 24일의 전세(戰勢) 전환에 따라서 미 제8군사령부도 부산에서 대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시작된 전쟁이다.
[발단]
북한군이 9월 4일 무렵부터 전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펼치자 유엔군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경상북도의 경주와 영천에서 국군이 패퇴하자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 제8군사령부 지휘부의 기간요원만 대구에 남기고 나머지 요원은 모두 부산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하였고, 육군본부도 9월 5일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경과]
‘왜관-다부’ 전선은 8월의 위급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전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이에 다부동의 미 제27연대·제23연대를 소속 사단으로 복귀시키고, 전투 지경선을 재조정하여 다부 정면 가산까지를 미 제1기병사단이 맡고, 국군 제1사단은 우측 팔공산 산악 지대 정면을 맡았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총공세는 9월 2일부터 감행되었고,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기까지 일전 일대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9월 4일에 8월 공방전을 통해 확보한 ‘왜관-다부’ 일대의 주저항선이 북한군의 공세에 의해 붕괴되었다. 9월 5일부터는 미 제1기병사단의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9월 8일에 북한군 제3사단은 왜관까지 진출하였다. 9월 11일 북한군이 대구(大邱) 북방 12㎞에 위치한 동명 구덕리(九德里)의 315고지로 진출하고, 600고지[箕聖]를 위협함으로써 대구 함락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9월 12일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에게 가산 일대에 대한 총 역습을 명령하였다. 9월 14일 국군 제1사단은 가산산성 일부를 탈환하고, 미 제8기병연대 제3대대도 동명(東明)의 570고지를 탈환하였고. 이날 밤 북한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의 철수 징후가 보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던 날 미 제8군은 제24사단을 대구 부근으로 이동키시고, 제1군단은 반격 준비를 했다. 9월 16일 유엔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팔공산-가산 일대에서 북한군을 빠르게 격퇴시켰다. 미 제1기병사단은 제5연대 전투단을 왜관 금무봉에 투입하고, 17일에는 사단 예비인 제7기병연대를 제5기병연대의 지천(枝川)-왜관(倭館) 지역에 투입했다. 18일에는 B-29 폭격기 42대가 왜관을 폭격했으며, 팔공산 우측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군위군 지역으로 북상하여 악계면 창평(昌平)-효령면 중구(中九) 간의 16㎞를 우회하여 효령면 소재지 일대와 구안국도[대구-안동 간 국도]를 제압했다. 19일에는 팔공산 좌측의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북한군의 배후를 공략하는 작전 아래 효령면 ‘매곡(梅谷)-374고지·266고지’[가산면 석우리]를 탈환하여 다부-상주 간 25번 국도 축선을 차단하고, 가산 정면의 제15연대는 ‘558고지[가산리]-741고지[금화리]-천평’으로 우회하여 다부 일대의 북한군 퇴로를 차단했다. 같은 날 미 제1기병사단도 제5연대 전투단이 왜관을 탈환하고, 20일에는 ‘금무봉-자고산-328고지’[석적면 포남리]를 탈환한 후 낙동강을 도하하여 옛 왜관[약목면 관호 2리]까지 진출했다.
9월 21일 새벽 북한군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李學九) 총좌(總佐)[대령급]가 미 8기병 연대로 투항하였다. 이날 미 제7기병 연대는 ‘도개(道開)-다부동’을 경유하여 오후 5시 35분 무렵 학명리(鶴鳴里)에서 제8기병 연대와 합류했다.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하판(下板)을 거쳐 북한군의 마지막 거점인 선산군 장천면 신장리에 위치한 천생산(天生山)을 탈환하고, 제12연대는 효령 일대의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결과]
9월 22일에 미 제8군은 낙동강 전선 각 부대에 작전 명령 A 108호를 발해 북한군에 대한 전면적인 추격을 명령하였다. 이날 제15연대가 가산면 천평 일대에서 365고지-금화리 진동(陳東)으로 남진하여 미 제14기병 사단과 협공을 펼치자 다부 일대의 북한군 제13사단은 와해되기 시작하여 병력의 일부만 경북 상주(尙州) 방면으로 패퇴하였다. 이로써 낙동강 방어선에서 벌어진 왜관·다부동 공방전은 유엔군과 국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