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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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漆谷架山山城 |
영어음역 | Gasansanseong |
영어의미역 | Gasansa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가산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외 11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희돈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1년 3월 26일 - 칠곡 가산산성 사적 제216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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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칠곡 가산산성 사적 재지정 |
성격 | 산성 |
양식 | 석축 산성 |
건립시기/연도 | 1639년~1741년 |
관련인물 | 이명웅(李命雄)|이세재(李世載) |
길이 | 11.041㎞ |
둘레 | 10.1㎞ |
면적 | 194,742㎡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산성(山城).
[개설]
칠곡 가산산성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 외 11필지에 위치하는 조선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으며, 주변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산성은 해발 901.6m의 천험(天險)의 가산 골짜기를 이용하였고 내·중·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사대문지와 암문·수구문·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있다. 성(城) 내에는 물이 풍부하여 산성 입보의 시설을 갖추고 있고 내·중·외성은 각기 시대에 따라 따로 축성되었다.
[건립경위]
칠곡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架山) 요새에 삼중(三重)으로 축성되었다. 1639년(인조17)에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된 이명웅(李命雄)[1590~1642]이 “경상도 60주(州)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晋州)·금오(金烏)·천생(天生)의 3성 뿐이므로 적지(適地)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도임 후 천생산성(天生山城)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泉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가축(加築)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축성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1640년) 4월까지 내성을 쌓았다. 칠곡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京山府)[현재 성주]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되고, 이후 약 180년 동안 부의 치소(治所)인 읍치를 산성 내에 두었으며, 진관(鎭管)은 4개 현[군위, 의흥, 신령, 하양]을 관장하였다.
칠곡도호부 관아(官衙)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관아를 옮기기를 갈망하여 왔다. 1819년(순조 19)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평지인 팔거구지(八莒舊地)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칠곡 가산산성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제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1608~?]이 경상감사 이만(李曼)[1605~1652]과 합심하여,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건물(建物)·포루(砲樓)·남쪽 곡성(曲城)·북쪽 구책(舊柵) 등을 중수(重修)하였다. 외성(外城)은 1700년(숙종 26) 경상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1648~1706]의 장문(狀聞)[임금에게 글을 올림]으로 왕명을 받아 1701년에 완성하였다. 중성(中城)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장문하여, 왕명으로 그 해에 완성되었다. 칠곡 가산산성에는 식량과 병기를 충분히 비축할 양창(糧倉)[남창·북창]·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중성의 성벽은 내·외성에 비해 작고 동문은 홍예문(虹霓門)[무지개문]이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칠곡 가산산성에 별장(종9품)을 두고 가산진(架山鎭)을 설치하였다.
[위치]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192m]에서 시작된 산맥의 서북쪽 15㎞ 지점의 끝부분에 위치한 가산(架山)[901.6m]은 평정봉으로서 상당히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북쪽으로 천생산성과 유학산(遊鶴山)[839m]에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다부동에 접하여 있다.
[형태]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1999년에 조사한 『칠곡 가산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내성의 총 길이는 5.071㎞, 면적은 587,433㎡이다. 외성의 총 길이는 내성 축조 때 이미 만들어진 동문 좌우 성벽 454m를 제외하고 4.669㎞이며, 면적은 1,509,289㎡이다. 내성을 동서로 가로막아 초축(初築)의 내성 남쪽 1/2을 중성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는데 중성만의 면적은 359,451㎡이다. 동문과 중문의 좌우 연결 성벽을 포함한 칠곡 가산산성 축성 총 길이는 11.041㎞이며, 동문·중문의 좌우 연결 성벽을 제외하고 내성·외성 모두를 합친 가산산성의 총 둘레는 10.164㎞가 된다. 성안의 총 면적은 194,742㎡이다.
동문은 외성 축조 이전까지 내성의 정문이었다. 개구부의 정면은 남동향이며 입면 모양은 윗부분을 둥글게 한 홍예문(虹霓門) 형식으로서, 좌우에 길이 168㎝의 장방형 홍예기석(虹霓基石)을 놓고 거기서부터 정상으로 가면서 원호를 이룬 전형적인 홍예문 양식이다. 개구부의 폭은 275㎝이며, 지대석에서부터 홍예종석(虹霓宗石)까지의 높이는 390㎝이다. 동문의 좌우 육축부(陸築部)는 방형에 가깝다. 동측의 것은 붕괴가 심한 편이고, 서측의 육축부 역시 양호한 상태는 아니다. 동문 육축부의 상면에는 문루를 두었던 주초석을 발견할 수 있다.
남문은 외성의 정문인 동시에 내·외성 전체의 정문이다. 개구부는 남서향이며, 1954년의 집중 폭우로 유적의 대부분이 유실되었는데, 이후 1977~1980년에 걸쳐 남문루 및 남문과 암문·수구문·여장 185m를 복원·중수하였다. 남문의 육축부는 방형이나 동문과 같이 전면을 돌출시킨 적대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남문의 개구부는 동문과 같은 홍예문으로 1단의 홍예기석을 세우고 홍예종석 좌우로는 4매의 홍예석을 두었다. 개구부의 폭은 341㎝, 바닥에서 홍예종석까지의 높이는 330㎝이다. 남문 육축부 상면에는 벽돌을 쌓은 여장을 설치하여 문루를 보호하였고, 그 좌우로는 성돌과 같은 석재를 이용하여 평여장을 시설하였다. 칠곡 가산산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북문은 형태가 평거식(平据式)으로 개구부의 규모는 폭 256㎝, 높이 180㎝이며, 천정은 길이 335㎝, 폭 72㎝, 두께 52㎝의 장방형 판상석 8매를 결구(結構)하여 놓았다. 성문벽 외측으로 돌출된 방형의 적대 시설을 갖추고 있어 암문과는 구별이 된다.
서문은 칠곡 가산산성의 제일 북쪽 돌출된 부분에 위치한다. 서문은 북문과 마찬가지로 평거식 개구부를 하고 있다. 성문의 바깥쪽으로는 본 성벽에서 돌출 되어진 적대 시설이 있으며 성문 안쪽으로는 육축부를 보호한 옹벽이 마련되어 있다. 개구부의 형태는 좌우로 1매의 장대석을 세우고 상면으로는 길이 287㎝, 폭 75㎝, 두께 45㎝, 판상 석재 7매를 결구하여 놓아 천장석을 하고 있다. 개구부의 폭은 260㎝, 높이 180㎝로 북문과 크기가 거의 같다. 서문의 상면에는 원형 주초석이 유존하고 있어 문루를 두었다고 추정된다.
중문은 내성의 중앙을 가로막아 내성의 1/2을 보호하기 위하여 1741년 중성 축조 시에 만들어진 문이다. 1954년 대홍수 때 유실된 남문루·남문·수구문·여장 등을 복원할 때 중문도 같이 복원·중수하였고, 1992년에 2차로 중문만을 다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구부의 입면 상태는 홍예식으로 중심점이 홍예기석 상에 걸쳐지는 반원형 홍예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홍예기석은 다석식 기석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홍예기석 좌우로 5매의 홍예석들을 조립하여 놓아 홍예종석에 이르고 있다. 중문의 정면은 동남향이며, 개구부 정면의 폭은 220㎝, 바닥에서 홍예종석까지 높이는 255㎝이다.
암문(暗門)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하는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의 개구부 형태는 전부 평거식이며 장대석을 결구하여 천장을 만들고 있다. 목재 문비를 설치하여 개폐하였다. 지표조사에서 밝혀진 암문의 수는 모두 15개로 기존의 사료[11개]에 기록된 숫자보다 많아 이후 증축 시 추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칠곡 가산산성의 수구문(水口門)은 지표조사 결과 4개소에서 확인되며, 그 중 2기는 1977년 복원되어 그 원형을 알 수 없고 다른 2기는 유실되고 흔적만 잔존할 뿐이다.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치(雉)로 추정되는 구조물은 내성에 12개, 외성에 12개, 동문 좌우로 2개 등 총 26곳이 있다. 치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반원형이며 몇 기는 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상면은 평탄하여 초소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와편의 출토 예로 보아 치 상면에 간단한 건물이 유존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황]
칠곡 가산산성의 성벽은 내성, 중성, 외성의 유구가 거의 남아 있으며, 문지도 남문, 동문, 중문 서문 및 암문 15개가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동문과 동암문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칠곡 가산산성 성 내에 천주사지, 보국사지 등의 사찰 터와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지가 조사되었으며 우물 9개소, 못 4개소와 성 내 비석 13기가 조사되었다. 중수기 편액이 남문루에 걸려있다. 1971년 3월 26일에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칠곡 가산산성은 인조 17년(1639)에 내성의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약 100여 년간의 긴 세월을 거쳐 축성되었다. 따라서 칠곡 가산산성은 17~18세기에 걸쳐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石城)으로써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그야말로 ‘영남 제1관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