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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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寧曺氏 |
영어의미역 | Changnyeong J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헌규 |
세거지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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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구덕리|봉암리|금암리 |
입향시기/연도 | 조선 중기/1540년 |
성씨시조 | 조계룡(曺繼龍) |
입향시조 | 조세우(曺世虞) |
[정의]
조계룡을 시조로 하고 조세우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세거성씨.
[연원]
시조(始祖)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女婿]이다. 모친은 창녕현 고암촌(皷巖村)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로, 혼기(婚期)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腹中)에 청용질(靑龍疾)을 얻어 백약이 무효했다. 어느 신승(神僧)의 말에 따라 화왕산 용담에 가서 목욕기도(沐浴祈禱)를 마치고 돌아온 후 신기하게 병은 완쾌되고 태기(胎氣)가 있었다. 어느 날 꿈에 왕관과 왕대를 두른 남자가 나타나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동해(東海) 용왕(龍王)의 아들 옥결(玉玦)이다. 이 아이를 잘 길러라 크면 공후(公侯)가 될 것이며 자손도 번영할 것이다”라고 하며 떠났다.
그 후 진평왕 48년에 생남(生男)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를 본 이광옥이 이상히 여겨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姓)은 조(曺), 이름은 계룡(繼龍), 자는 인경(鱗卿)이라 특사(特賜)하였다. 후에 부마(駙馬)를 삼음으로서 창성부원군에 봉해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 이르렀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가 신라 말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내고 고려 태조의 딸과 결혼한 조겸(曺謙)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후손들은 조계룡을 시조로 하고, 조겸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창녕이 세거지이기 때문에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입향경위]
입향조인 조세우(曺世虞)는 자가 백원(伯元), 호가 석당(石塘)이다. 부사(府使) 조상겸(曺尙謙)의 아들로 태어나 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문과에 등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537년(중종 32)에 김안로(金安老) 탄핵에 앞장서서 세 차례나 상소하여 사림(士林)의 기강을 세운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 1540년(중종 35)에 성주목사를 지내고 창녕(昌寧)에서 칠곡으로 이거하여 칠곡군 동명면에 세거지를 정하였다.
[현황]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 260여 가구 840여 명이 칠곡군 관내에 살고 있다.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와 봉암리·금암리[골북실]·양지리·하천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근래에는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관련유적]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에 석당(石塘) 조세우의 추모지소인 소술재, 봉암(鳳菴) 조수인(曺守仁)의 추모지소인 봉서재, 죽와(竹窩) 조정방(曺挺邦)의 재사(齋舍)인 신수재, 두암(杜庵) 조시보(曺時保)의 재사(齋舍)인 경암재, 조응대(曺應大)의 추모지소인 영모재, 조진하(曺振夏)의 추모지소인 운양재, 기헌(寄軒) 조병선(曺秉善)의 추모지소인 심원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