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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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漆谷郡洛東江邊-水運-倭館- |
영어의미역 | Water Traffic and Waegwan Story of Nakdonggang Riverside in Chilgok-gu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
집필자 | 박헌규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근대 교통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대량의 물자 수송을 했었던 낙동강 수운.
[개관]
영남 내륙 지역의 농수산물의 교역장으로서 칠곡군의 중심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낙동강 연안은 나루터, 조선 초에 왜구들의 금구책으로 교린정책을 쓰면서 칠곡군 낙동강 유역에 설치했던 왜관, 6·25전쟁 때 조국의 운명을 지켜낸 천혜의 요충지 낙동강의 교두보와 관련된 곳이다. 경상북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칠곡군은 낙동강의 중류와 접하고, 강이 칠곡군의 중앙으로 흐르면서 강 건너편 서쪽 연안은 북삼면, 약목면, 기산면이 접해 있고, 동쪽 연안은 석적읍과 왜관읍이 접하고 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대개편에 따라 인동군이 칠곡군에 병합되면서 칠곡군의 3개 읍과 2개면이 낙동강과 접하고 있어 옛날부터 낙동강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조선시대 낙동강과 왜관에 얽힌 이야기]
‘왜관(倭館)’이라는 글자가 일본 왜(倭)자에 집 관(館)자를 쓰고 있으니 왜인(倭人)과 관계된 지명임을 누구든지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왜관에서 살아가는 주민들도 ‘왜관’의 정확한 역사적 유래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문헌 기록이나 사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왜관’이란 고려 말기 이후 조선 전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그 회유책으로 삼포를 개설하여 일본인들이 조선을 왕래하면서 무역하는 것을 공허(公許)하고 또 거기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交易), 접대(接待), 숙박(宿泊)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게 하였는데, 왜관의 개시(開市)는 정주(定住)왜인(倭人)에 한하고 동래부의 확증(確證)하에 관헌(官憲)의 감시를 받으면서 매월 6차(5일장)로 제한한 후 청일무역이 성해짐에 따라 쇠퇴하여 고종 초기에 와서 왜관은 폐쇄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교역(交易)을 개시하면서 왜인(倭人)들이 상품 운반에 관한 어려움과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낙동강의 수로(水路)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낙동강 연안에 임시로 먹고 쉬어갈 수 있는 중로(中路) 숙소(宿所) 즉 소왜관(小倭館)이 낙동강 연안 여러 곳에 설치됨으로 인하여 그 곳이 하나의 지명으로 변하여 오늘날 까지 전래(傳來)된 것인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낙동강 수운을 이용한 교역(交易) 사실을 잘 알지 못하여 임진왜란 후 왜병이 주둔(駐屯)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생긴 지명이라고 잘못 알고있다.
남해안에 설치한 포소(浦所)의 왜관을 제외하고는 상경 왕래하는데 수로를 따라 당일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중로(中路)에 왜인들이 유숙(留宿)할 수 있는 숙소가 있었는데, 김해 왜관지의 중로 숙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김해부 명월산조에 의하면 명월산은 김해부의 남쪽 4십리에 있고 산하인 구량촌의 견조암에 수참(水站)이 있어 왜국의 사신을 접대하였다고 하였다. 창원 왜관지의 중로 숙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부 주물연진조에 주물연진은 창원부의 북쪽 4십리에 있으며, 칠원 고을 매포의 하류이다. 언덕 위에 작은 공관을 개설하여 배를 타고 왕래하는 왜인의 사신을 접대하였다고 하였다. 화원창 왜물고(倭物庫)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성주목 창고조에 화원창은 예전에는 인흥사(仁興寺)를 빌려서 화원현의 군수·미곡을 저장하였는데, 세조(世祖) 때에 화원의 남쪽에 다시 세웠다. 왜국의 사신이 가지고 오는 동(銅)·철(鐵)·선목(蘚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저장하여 사용하는데 이바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칠곡 금산동 왜관지는 『경산지(京山誌)』 고적조에 칠곡부의 노곡방[현 왜관읍 낙산리]에도 왜관의 구지(舊址)가 있어 왜국의 사신이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상경시 유숙(留宿)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칠곡부의 관할이었던 노곡방은 대곡[한실], 강창[금산2리 강변], 송라[낙산동], 보병동[보뱅골] 등 4개리로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왜관읍의 금산, 낙산, 금남 등 3개리가 해당된다. 왜관의 구지(舊址)는 지금의 금산리 낙동강변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며, 구전에 의하면 강창[현 금산리]에서 당시 정부 창고로 사용했던 건물의 벽돌을 해체해 1899년 낙산성당 설립 초기 성당을 건축하는데 활용하였으며 성당 겸 서당으로 이용되었다고 전한다.
칠곡군 약목 관호동 왜관지(구왜관)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나 당시 낙동강을 소항(溯航)하여 상경하는 중로의 지점으로서 왜사(倭使)의 유숙(留宿) 및 통상(通商)을 위한 소공관(小公館)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이 강변에 잔존하는 유구(遺構)의 흔적을 보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간행된 『인동부읍지(仁同府邑誌)』의 지도 상에 왜관진(倭館津)이 있으며, 1904년경에 편찬한 일어판 『경상도사정(慶尙道事情)』에 칠곡군 약목면의 왜관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명 자체가 확증하여 준다. 일제 때 간행된 『칠곡지(漆谷誌)』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축성하였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백포산성(栢浦山城)[삼국시대에 축성한 토성] 또는 왜성대 등으로 명명하여 전래되고 있는데, 당시 왜인들이 우리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왜인들과의 접촉이나 상품의 도난 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강변에 쌓은 담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상과 같이 낙동강 중로의 숙소 격인 소공관(小公館)이 문헌상으로 5개소의 소왜관(倭使專擔)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에서 2개가 칠곡군 관내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로 교통의 중심지가 군사적 요충지가 되다]
임진왜란 때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왜적들이 북상을 했으며, 1950년 북한이 남침해 온 6·25전쟁 때는 왜관을 중심으로 낙동강 교두보(洛東江 橋頭堡)가 구축되어 왜관과 다부동에서 50여 일 간 대격전 끝에 조국의 운명을 지켜낸 낙동강 대첩(大捷)도 낙동강과 칠곡군 왜관이 군사적으로 천혜(天惠)의 요충지(要衝地)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칠곡군은 일찍부터 호국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애환이 서려있는 나루터 이야기]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 '물자를 옮기는 방법은 말이 수레와 같지 않고, 수레는 배와 같지 않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판이 적으므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배로써 화물을 싣고 운반하여 생기는 이익이 더욱 났다.'고 하였다. 이 말은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강을 이용한 교통과 운송이 편리함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루는 육로와 연결되어 발달하였다. 육지가 연속된 곳에서는 도로가 발달하지만 큰 강이 흘러서 육로를 가로막는 곳에서는 토목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배를 이용한 나루가 발달하였다. 또한 나루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지점에도 발달한 것은 배를 이용한 이동이나 물자의 수송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형지세가 험하고 거리가 먼 곳에서는 배의 이용도가 높았다. 이와 같이 도하(渡河)를 하거나 소강(溯江)을 할 경우 내륙수로와 관련된 나루에는 소위 나루터 취락이 형성되었다. 나루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많아 상대적으로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나루터 촌락이다.
칠곡 지역에는 낙동강이 칠곡군의 중앙을 남류하고 있어 나루터와 관련된 애환이 많이 서려있는 고장으로 나루터 또한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있다. 칠곡군의 중앙을 가로질러 남류하고 있는 강의 총 24.5㎞ 구간에 위치하고 있는 나루를 보면 석적읍의 밤실나루, 개내미나루, 북삼읍의 말구리나루, 약목면의 구왜관나루, 기산면의 강정나루, 흰돌나루, 노실나루, 왜관읍의 왜관나루, 공암나루, 강창나루, 가실나루, 금남나루 등 12곳에 이른다.
이중에서 가장 번창했던 곳이 왜관읍에 있는 왜관나루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옛날 이곳은 성주와 칠곡의 물류 중심 지역으로 인적`물적 교류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일제 초기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소금 배가 왜관나루에 정박하여 이 지역 주민들과 물물교환을 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이곳 나루터 주변에는 10여 호의 객주가 있었는데 번창하지는 않았다.
한일합방 후 1914년 행정구역 대개편에 따라 칠곡군과 인동군이 통합되면서 파미에서 왜관으로 불려지고, 칠곡군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왜관이 칠곡군의 중심이 되었다. ‘왜관’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전에는 왜관나루를 돌밭나루로 불렀다. 소금 배는 보통 부산 하구 또는 사문진[지금의 화원] 화원창고에서 보관되어 있던 해산물을 싣고 다녔고, 수심이 얕은 봄과 겨울철에는 사공들이 물에 들어가 멜빵으로 끌어올렸고, 여름철 수심이 깊을 때는 돛단배를 이용하였다. 배들은 상주나 안동까지 가서 농산물과 물물교환을 했다. 명지도(鳴旨島)의 소금은 영남 지방의 유일한 소금 생산지로 경상도 70여개 고을에 공급되었다. 당시 낙동강에는 하구에서 올라온 소금 배(상선)와 조운선(나라에 바치는 조세미 수송선), 왜선 등이 많이 왕래했는데, 소금 배에는 소금과 생선(조기, 통대구, 청어, 갈치, 간고등어, 멸치, 새우젓, 상어) 등을 싣고 다녔다. 낙동강 하구에서 온 배들은 왜관나루에서 정박한 다음 각처에서 모여든 객주들과 거래를 했다. 당시 객주가(客主家)에는 짐을 내리는 목도꾼과 거간꾼, 보부상, 뱃사람 등 많은 식솔들이 딸려 있었다.
[정참봉의 남일정미소와 곡물상]
수로 교통의 중심에 위치한 왜관은 당시에 곡물 도매업자가 최성수기에는 수십여곳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정참봉(鄭在文)의 남일상점[남일정미소]은 낙동강 하류에서 올라오는 첫째 선착장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며 상포에서 내려오는 길과 낙산에서 올라오는 길이 맞닿는 곳으로 뱃길과 삼거리를 이루어 당시 곡물거래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데다가 정직과 성실을 밑천으로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여타의 추종을 불허 기반을 굳혔다. 이에 대항하여 상포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합동으로 제일정미소[1936]를 만들어 남일정미소와 쌍벽을 이루었다. 한일합방 후 일본은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개선한다는 미명 아래 토지소유령을 공포하고(1912)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하여금 광대한 토지를 강탈하게 하여 경제적 착취의 기반을 강화하면서 일본의 식량공급지로서의 식민정책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아시아 대륙의 침략을 위해 부설한 경부선이 영남 지방을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교차되는 칠곡의 왜관을 수운과 함께 교통의 요지로 각광받게 만들었다.
당시 강폭은 지금의 반도되지 않지만 수심은 매우 깊어 4·5십 척의 돛단배가 왕래하면서, 남으로는 창녕·고령에서 북으로는 안동까지 곡류(벼, 대두)와 소금이 왜관을 중심으로 집산되고 있었다. 당시 왜관으로 집산된 벼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데도 남일정미소에서 100마력의 증기터빈으로 고무 롤러를 이용하여 도정(40~50명이 작업하여 하루에 한 화차 분을 도정)하여 서울에서 내려온 객주에게 팔아 농비를 마련하였으며, 낙동강을 통해 집산된 농산물과 도정후 왜관역에서 경부선을 통해 반출되는 쌀과 콩은 부산으로 내려가서 일본인 객주들에게 팔아 멀리 일본까지 나갔고, 왜관에는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까지 있어 성업을 이루었다. 구전에 의하면 남일정미소가 영남에서는 제일가는 정미소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전한다. 지금까지 남일정미소 굴뚝은 당시 도정 과정에서 나오는 등겨를 연료로 이용, 화력으로 100마력의 증기터빈을 가동하기 위해 세운 굴뚝이다. 지금도 삼오창고 옆에 명물로 남아있던 붉은 벽돌조의 굴뚝은 2004년 8월에 왜관 강변도로가 개설되면서 안타깝게 철거되었다.
[경부선 개통으로 더욱 번성한 왜관나루]
왜관 장날이면 성주 등에서 온 소달구지 행렬이 이어졌고 쇠풍경 소리가 밤이 새도록 들렸다고 한다. 당시 왜관나루와 강정나루를 왕래하던 배는 통배로 상당히 큰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배는 왜관과 성주를 왕래하던 버스는 물론이고 화물차, 소달구지, 사람 등을 실어 날았다. 지난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낙동강 연안의 모든 나루터가 급격히 쇠퇴하였는데, 왜관나루와 강정나루 만은 더욱 번성하였다.
부산에서 철도로 직송된 경북 북부 지역의 화물들이 왜관나루를 통하여 경북 북부 지방으로 운송되었으며 북부 지방의 농산물과 임산물이 왜관나루로 운송되어 왜관역이 철도 수송의 거점이 되었다. 수로를 통한 경북 북부 지방의 화물이 증가되자 왜관역과 가까운 낙동강변에서 왜관역 사이에 협궤(狹軌)를 부설하여 무개차(無蓋車)에 화물을 싣고 사람들의 미는 힘으로 운반하였으며, 경부선 개통 후 왜관나루는 강정나루와 함께 경북 북부지방에서 왜관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 이었다.
[육로 교통의 발달로 나루터는 서서히 사라지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중앙선과 경북선이 개통되면서 경북 북부 지역의 화물량이 줄어들어 협궤도 없어졌으며, 1941년 경부선 철도가 복선화되고 경부선 왜관철교가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교량으로 바뀌면서 왜관나루를 비롯한 칠곡 지역의 나루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기산면 일대 장꾼들이 나루를 이용하며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0년대에 완전히 폐쇄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강변 양안에는 제방이 없었다. 강정마을 앞 지금의 죽전 제2제방 안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울창했고 앞쪽으로는 밤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으며, 강에는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었는데, 지금 낙동강 변 나루터에는 옛 장꾼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낙동강 고수부지를 산책하는 사람들만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