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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49
한자 福星里-群
영어의미역 Dolmens in Bokseong-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답321-1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이희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인돌
건립시기/연도 청동기시대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답321-1 일대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군.

[위치]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답321-1번지 일대이다. 복성리 고인돌 남동쪽 1.7㎞에는 경부선 약목역이 위치한다. 금오산 도립공원 남쪽과 낙동강 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넓어지는 곡간평야지대이다. 이 평야지대 남쪽에 치우쳐 동류하는 경호천에 의해 사질이 우세하고 배수가 용이한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유적이 입지하기 양호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된 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은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으로 모두 22기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이중 매장유구로 판단된 유구는 17기로 보고있다. 이 17기의 묘형으로는 고인돌 2기, 고인돌이 파괴된 것으로 판단되는 것 1기, 돌널무덤 11기, 돌덧널무덤 2기 등이 있고 이외의 유구로는 구덩유구 1기, 돌덧널 1기, 기둥구멍 2기와 성격불명의 석단 및 부석시설 등이 있었다.

[형태]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된 보고서에 따르면 매장유구 17기중 장축방향을 알 수 있는 것은 16기이고 그중 북서~남동방향(N-23°~63°-E)의 것이 10기, 북동-남서(N-9°~36°-W)의 것이 6기이다. 시상의 위치에 따라서 지면 또는 지면에 가까운 위치에 상면을 만든 묘[地上式] 7기와 지하에 상면을 만든 묘[地下式] 10기가 있다.

1호 고인돌은 장방형의 포석을 갖춘 고인돌로 덮개돌의 상태는 표면 탈락이 심하고 남쪽으로 약간 이동된 상태였다. 잔존하는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355㎝, 폭 190㎝, 두께 100㎝이고 장축 방향이 N-53°-W이다. 구덩의 규모는 길이 410㎝, 폭 205㎝, 깊이 15㎝이고 주위로도 40~50㎝ 내외의 할석이 여러 매 노출되었다.

2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장방형의 괴석이나 후대 경작활동 등에 의해 3덩어리로 깨졌으며 규묘는 길이 430㎝, 너비 240㎝, 두께 140㎝ 정도이다. 시상의 규모는 360×140㎝이다.

3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200×125㎝, 두께 30㎝ 정도이다. 덮개돌 아래에는 30㎝ 내외의 할석이 다소 무질서한 상태로 1벌 깔려 있었고 시상의 구조는 불명확하며 유구 전체가 교란된 것으로 판단된다.

4호 구덩은 평면 말각장방형이고 장축 270㎝, 단축 187㎝, 깊이 32㎝이다. 구덩의 내부에는 길이 177×115㎝, 두께 40㎝의 할석 1매를 중심으로 주위와 상부에 할석이 채워져 있었다.

5호 석단 및 부석시설의 석단은 평면장방형의 석단을 중심으로 기둥구멍군과 그 외곽에 ‘ㄷ’자형으로 부석된 시설이 있는 유구이다. 석단은 평면 장방형으로 길이 250㎝, 너비 160㎝의 범위에 30㎝ 내외의 할석을 1~2벌 깔아 평면 장방형으로 마련하였다. 부석군의 전체범위는 11.3m×9m 이다.

6호 돌널무덤의 규모는 길이 107㎝, 폭 45㎝, 바닥석 상면에서 벽석 상단까지의 높이 10㎝, 구지표에서의 높이는 27㎝이다. 유구의 축조는 판석 및 할석 등을 이용해 벽석을 축조하고 내부공간에 10㎝ 가량 흙을 깔고 시상석을 높여 수평을 맞췄다. 벽석 주위로는 벽석 상단 높이에 맞추어 대소 할석을 놓아 돌널을 감쌌는데 이 할석군 세 모서리에 길이 60㎝ 가량의 괴석이 관찰된다. 괴석의 배치로 보아 받침돌일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덮개돌을 갖춘 고인돌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7호 돌널무덤의 유구의 길이는 180㎝, 폭 75㎝, 깊이 10~20㎝의 판석조 돌널을 축조하였다. 돌널의 축조는 길이 240㎝, 폭 130㎝의 장방형 구덩을 파고, 바닥면에 길이 40~50㎝의 할석제 판석을 종방향으로 2열을 깔았는데, 이 바닥석의 장축방향과 무덤구덩이의 장축방향이 약간 어긋나 있다. 그래서 빈공간이 생긴 동단부쪽 바닥에 할석제 판석을 1매 더 놓았다.

8호 돌덧널무덤의 사질토층에서 확인된 유구는 길이 120㎝, 폭 45㎝, 깊이 50㎝인 돌덧널무덤이다. 돌덧널의 축조는 기반토가 거의 순수한 사질토로 평·단면상에 뚜렷한 굴광선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돌덧널보다 훨씬 넓은 범위로 무덤구덩이를 팠을 것으로 판단된다. 벽석은 30㎝ 내외의 납작한 할석 및 천석을 3~4단 평적하였고, 동시에 바깥으로 2~3단 벽석을 보강하여 돌덧널을 평면상에서 보았을 때, 2겹으로 축조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북단벽은 가장 안쪽에 판석 1매를 세웠고 바닥에는 3~5㎝ 가량의 자갈 및 할석을 1벌 깔았다.

9호 돌덧널무덤의 사질토층에서 확인된 유구는 길이 120㎝, 폭 55㎝, 깊이 45㎝이며 8호와 동형동대(同形同大)이나, 훨씬 정성들여 축조되어 있다. 벽석은 30㎝ 내외의 할석을 주로 세로쌓기하였고, 벽석 바깥쪽에 다시 할석으로 보강하였다. 바닥에는 3~5㎝ 가량의 자갈 및 할석을 1~2벌 깔았는데, 이중에 민무늬토기편이 섞여 있으며 의도적으로 매납된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10호 돌널무덤의 유구의 축조는 먼저 평면 타원형에 가까운 말각장방형의 구덩을 팠는데, 길이 175㎝, 폭 89㎝, 깊이 47㎝이다. 돌널은 길이 100㎝, 폭 40㎝, 깊이 55㎝이다. 돌널은 바닥에 다소 각이 많은 할석은 4매를 깔고 양단 벽석을 그 위에 세웠고, 장벽석은 굴광면 바닥위에 다소 납작한 할석을 면이 겹치도록 덧대서 세워 축조하였다. 돌널에 사용된 석재는 각이 많고 크기도 일정치 않아 돌널의 구조가 엉성한 느낌을 주며 내부공간으로 벽석이 쏠려 있는 상태였다. 뚜껑돌은 50㎝ 정도의 할석 4매로 가지런하지 않게 덮고, 보다 작은 할석으로 빈틈을 막았다.

11호 돌널무덤의 무덤구덩이는 평면 말각장방형이고, 잔존규모는 길이 138㎝, 폭 92㎝, 깊이 10㎝인데, 깊이가 거의 없어 돌널 바닥석의 상면(上面)이 구지표와 같은 높이다. 무덤구덩이 내부에는 판석을 깔고 주위에 할석을 세워 돌널을 축조하였는데 길이 95㎝, 폭 75㎝이다.

12호 돌널무덤의 돌널은 길이 190㎝, 너비 55㎝, 깊이 70㎝이고 남단부쪽의 뚜껑돌 1매가 내부로 떨어져 있었다. 무덤구덩이는 먼저 길이 310㎝, 폭 166㎝, 깊이 72㎝이고, 기반토의 토양이 사질성이 강하여 뚜렷한 굴광선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보다 아래층에서는 확인되었다. 돌널의 축조는 바닥 전면에 판석을 깔았는데 중앙부에 길이 60~70㎝의 판석 7매를 획으로 깔고 주위에 20~40㎝의 판석을 놓았다. 바닥석 위로는 두께 3㎝ 가량의 고운 흙을 깔아 시상(屍床)으로 사용하였다. 벽석은 바닥석 위에 판석을 세우고 흙고 돌로 보강하였는데, 판석 뒤쪽에 다른 판석이 면이 겹치도록 덧대어 쌓고 상부에는 포석(鋪石)과 같은 높이까지 1~2단 정도 가로쌓기하였다. 벽석 최상단석은 포석과 같은 높이에 놓이나 돌널 외곽을 돌아가며 정연하게 놓여져 포석과는 비교적 뚜렷한 경계를 이룬다. 이로보아 돌널의 벽석 상단석 및 뚜껑돌 설치와 포석의 설치는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뚜껑돌은 40~60㎝ 크기의 판석을 3겹 정도 덮어 벽석 상단과 같은 높이로 하였다. 포석은 장축방향이 돌덧널과 동일하고, 길이 11.6m, 잔존폭 4m, 추정폭 7.6m이다. 포석의 가장자리에는 길이 50~100㎝ 가량의 큰 할석이 배치되었는데 무너진 상태로 보아 최소 3단 정도는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안쪽에는 길이 30~60㎝의 할석이 한겹 깔려있었다.

13호 돌널무덤 돌널은 길이 75㎝, 폭 40㎝, 높이 19㎝이다. 돌널의 벽석은 구지표면에 축조된 지상식(地上式)이며, 길이 30㎝ 내외의 할석을 사용하였다. 돌널내 서단부에는 할석 1매가 안정된 상태로 놓여있었다.

14호 돌널무덤의 유구는 길이 110㎝, 폭 43㎝, 깊이 40㎝인 판석조 돌널무덤이다. 돌널의 축조는 대체로 각이 많고 납작한 석재(石材)를 사용하였는데, 바닥에 3매를 깔고 둘레에 벽석을 2~3단 가량 쌓았는데, 각이 많은 할석을 세우고 다시 그 뒤에 면이 겹치도록 덧대서 쌓아 올리므로 벽석이 내부로 쉽게 무너져 내린 것을 보인다. 뚜껑돌은 길이 35~68㎝의 할석을 사용하여 2겹 정도 덮었다.

15호 돌덧널은 12호 부석내에 있으며, 대소 할석을 사용하여, 1단 돌려서 길이 90㎝, 폭 50㎝의 돌널구조물을 축조하였다.

16호 토광묘 유구의 축조는 평면 타원형에 길이 96㎝, 폭 49㎝, 깊이 31㎝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내부에는 길이 20㎝ 가량의 할석을 남단쪽 바닥에 놓고, 서장벽에 기대어 2매의 판석을 세워두었다. 무덤구덩이 서쪽으로는 자갈 혼입층이 확인되었다.

17호 돌널무덤 돌널은 지상식(地上式)이며, 길이 97㎝, 폭 30㎝이다. 유구의 설치는 길이 40㎝ 정도의 판석 5매를 횡으로 잇대어 깔아 바닥석으로 삼고 둘레에 할석을 돌린 것으로 판단되며, 1단만 일부 잔존한다.

18호 돌널무덤의 무덤구덩이의 길이는 220㎝, 폭 120㎝, 깊이 43㎝이다. 돌널의 규모는 길이 165㎝, 너비 55㎝, 깊이 30㎝이고, 벽석은 비교적 납작한 할석을 2~3단 세워서 축조하였는데, 하단 벽석 뒤쪽으로 면이 겹치도록 덧대어 쌓아, 견고하지 못한 벽석 상태를 보인다. 벽석 내부에는 바닥석을 3매 깔고 바닥석 상단(上端)높이까지 흙을 깔아 시상(屍床)으로 하였다.

19호 돌널무덤 암갈색 사질토층에서 확인된 유구는 길이 103㎝, 폭 43㎝, 깊이 38㎝인 판석조 돌널무덤이다. 돌널의 축조는 말각장방형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4매의 할석을 깔고, 주위에 할석재 판석을 세워 벽석을 축조하였다. 그 위에 뚜껑돌로 길이 50㎝, 폭 30㎝ 가량의 납작한 할석 3매를 종뱡향으로 덮었는데 이 판석이 돌널내부로 빠지지 않도록 약간 사뱡향으로 틀어 뚜껑돌과 벽석간에 서로 걸쳐지도록 놓았다.

20호 돌널무덤은 자갈이 혼입된 암갈색 사질토층에서 확인된 유구는 잔존길이 55㎝, 폭 80㎝, 높이 32㎝인 판석조 돌널무덤이다. 돌널의 노출상태는 4호에 파괴되면서, 전체적으로 북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돌널의 축조는 무덤구덩이바닥에 판석을 깔고 주위에 판석을 세워 벽석을 축조하였다.

[출토유물]

복성리 고인돌군에는 각 유구내에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았고 몇 기의 유구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

1호 고인돌 주위에서 민무늬토기편과 석기, 삼국시대 토기편 기와편 등이 섞여 노출되었다.

2호 고인돌은 받침돌 사이에 삼국시대 토기편이 검출되었다.

5호 석단 및 부석시설에서는 부석군 사이에 민무늬토기편 9점과 석기 2점이 발견되었으나 편이 작아 기형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6호 돌널무덤에서 돌도끼 1점이 발견되었으며 잔존길이는 12.8㎝, 너비 5.8㎝, 두께 3.6㎝이다.

8호 돌널무덤 서장벽쪽에 유경식 간돌검이 1점 확인되었다.

12호 돌널무덤 유물은 남동단벽 쪽에서 관옥 40점이, 돌널 중앙부에서 서남장벽쪽으로 치우쳐 돌화살촉 11점이 출토되었고, 단도마연호(丹塗磨硏壺) 1점은 바닥에서 15㎝ 정도 뜬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동남단부의 뚜껑돌이 내부로 떨어진 것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포석 내에서 돌도끼 1점, 숫돌 1점, 석제검파두식[돌로 만든 칼자루 끝 장식] 1점이 수습되었다.

18호 돌널무덤의 시상 중앙부에서 돌화살촉 6점이 노출되었다.

[현황]

묘의 배치상태를 보면, 비교적 큰 묘는 일정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데, 그 주변으로 상대적으로 작은 묘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큰 묘간의 간격을 생각한다면, 피장자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벽석의 축조상태를 보면 대체로 면이 고르지 않고, 두께도 일정치 않은 할석을 사용하여 벽석의 축조상태가 엉성한 느낌을 준다. 특히 판석조 돌널무덤(10호, 12호, 14호, 18호묘)의 경우 폭이 좁은 할석을 눕혀쌓기 하였는데 충전토가 사질성의 흙에다가 상단벽석이 하단벽석 뒤에서 면이 일부 겹치도록 덧대어 설치하여 벽석이 견고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남아있는 벽석을 보면, 원상이 그리 견고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바닥의 설치는 굴광면 그대로를 사용한 5기를 제외하고, 자갈이나 판석을 이용하여 설치하였다. 바닥석이 설치된 묘는 두 가지 형태가 관찰되는데, 굴광바닥 전면에 판석을 판 것(10, 12호)이 있고, 석곽(관) 내부범위에만 자갈이나 판석을 판 것(6, 7, 8, 9, 11, 17, 18, 19, 20)이 있다. 그러나 석곽(관)의 축조과정을 추정해본다면 몇 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벽석이 바닥석을 조금씩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닥석부터 놓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유물이 노출된 2기(12호, 18호)의 경우, 바닥석 위를 얇게 흙으로 덮어 최대한 수평을 맞추고 시상면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다른 묘들도 바닥석으로 쓰인 판석의 면이 고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흙을 덮어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이한 형태로 1호 고인돌의 경우는 위석식의 하부구조 안쪽에 구덩을 마련하고 내부에 목탄과 재가 포함된 흙을 채우고 시상면으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인근 주민들에 의하면, 근래까지 7개의 큰 돌들이 인접하여 있었으나 경작을 위해 부수거나 땅에 묻었다고 하며, 경북대학교박물관의 발굴 예비조사시에 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구덩유구가 확인된 것으로 보아 주변의 경호천 천변에 당시의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지** 福星里-群 → 福星里支石墓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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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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