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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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花里戰勝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Daehwa-r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 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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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73년 7월 7일 |
관련인물 | 김종오|임부택|김종수|김상흥|이건옥|김우희|신용관|이은상|김충현|태종학 |
재질 | 화강암 |
높이 | 410.8㎝ |
너비 | 297㎝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 1 |
소유자 | 충주시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에 있는 6·25전쟁 당시 국군 최초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건립경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은 7월 5일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까지 점령한 후 동락초등학교 교정에 북한군 15사단 84연대를 포진시켰다. 이를 파악한 국군 6사단 7연대 1·2대대가 불시에 공격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를 기념하여 충청북도가 주관하고 제3관구 사령부가 지원하여 전승비를 세워 1973년 7월 7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위치]
국도 3호선 도로 옆, 동락초등학교 앞 노변공원에 건립되었다.
[형태]
현대식 조형물로 26㎝ 높이의 기단을 5단으로 쌓은 후 그 위에 높이 114㎝, 길이 215㎝의 석재와 높이 280.8×82㎝의 판석을 얹었다.
[금석문]
비제는 ‘전승비’라 음각하였으며, 본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그렇게도 처참한 피를 뿌린 1950년 6·25동란 동족상잔의 비극이야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었다. 그러기에 북한 공산군들의 반역적인 남한 침공 때 우리는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그들과 싸우면서도 동포의 양심으로 울며 싸웠던 것이다. 마침내 비인간적이요 반민족적인 그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실로 다행이었던 바 가장 통쾌한 것은 무극리 전투였다. 우리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7월 6일 치열한 전투 끝에 무극리를 탈환하고 그대로 북진하다가 역습을 받아 음성 쪽으로 후퇴, 제2대대도 진천으로 향하다 다시 음성으로 귀환, 제3대대는 용원리 방향으로 철수했다. 7월 7일 공산군 제15사단 제84연대 병력이 장호원으로부터 충주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오므로 우리 제1대대는 무극리와 음성 사이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644 고지를 점령했었다. 이때 공산군들은 동락국민학교에 전병력을 집결 수십 대 차량과 일개 대대의 포까지 설치했으니 이를 발견한 우리 제2대대는 병력 겨우 400명, 연대의 지휘를 받을 길조차 없으므로 주저하다가 절호한 기회이므로 공격을 결정했었다. 마침내 도화는 터졌다. 7월 7일 정각 17시였다. 제6중대의 집중 사격은 문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다시 이어 우리 8중대의 포탄이 또 떨어졌다. 너무도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 한복판에 명중되어 포대는 완전 파괴되고 시체들이 공중에 떠올랐으며 도망가는 적들마저 우리들의 포위망에 섬멸되어 최후의 개가를 부르니 8일 8시였다. 이것이 통쾌한 승첩을 거둔 그날의 전투였거니와 길이 그 사실을 새겨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뒤에 오는 자손들에게 피 흘린 일을 기억케 하고 조국 수호와 자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조국의 염원인 통일 성업을 이루게 하고자 함이니 누구나 여기 오거든 옷깃 여미고 묵념을 올리며 나라 사랑할 생각을 거듭 다짐하시라. 1973년 7월 7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고 충청북도지사 태종학 세움. 이 전투에 참전한 지휘관들 제6사단 제7연대 사단장 대령 김종오, 연대장 중령 임부택 제2대대장, 소령 김종수, 제5중대장 중위 김상흥, 제6중대장 중위 이건옥, 제7중대장 중위 김우희, 제8중대장 중위 신용관.”
[현황]
대화리 전승비가 위치한 곳은 작은 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으며, 동락초등학교 교정 내에 1976년에 건립한 김재옥 여교사 현충탑비 및 충주여교사협의회에서 건립한 김재옥 교사 행적비와 더불어 학생들의 반공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 때 최초로 승리한 이 전투에서 400명의 국군이 적을 800여 명 사살했고, 포로 90여 명, 차량 60대, 장갑차 3대, 소총 1,000정, 박격포 35문, 기관총 47정, 포 12문 등을 노획한 반면 아군은 경상자 1명뿐인 대승리였다. 노획된 무기를 1점씩 UN본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라는 증거품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승리 지역인 이곳은 청소년들에게 숭고한 나라 사랑과 통일 교육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