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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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龜徵- 婢妾 者未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서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추모 시기/일시 | 1737년 - 구귀징의 비첩 자미 정려를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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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무태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서변동 |
묘소|단소 | 구귀징의 비첩 자미 묘소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
성격 | 열녀 |
성별 | 여성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열녀.
[활동 사항]
자미(者未)[?~?]는 구귀징(具龜徵)[1661~1687]의 노비였다. 스무 살 되던 해인 1687년(숙종 13)에 구귀징이 죽자 상복을 입은 뒤에 머리를 얹었다. 부모가 그 까닭을 묻자 “상전이 한 번 저를 돌아보았으니, 어찌 남이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내 마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문밖을 나가지 않고 3년을 지냈다. 부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품속에 칼을 품고서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였고, 다른 남자와는 말을 섞거나 웃지도 않았다. 70세에 사망하였다. 1830년(순조 32)에 발행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자미가 열일곱 살 때 구귀징이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묘소]
구귀징의 비첩 자미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적곡(積谷)에 있다.
[상훈과 추모]
구귀징의 비첩 자미는 1737년(영조 13) 정려(旌閭)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