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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반유신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59
한자 1973年反維新運動
영어공식명칭 1973year Anti-Yushin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

[정의]

1973년 대구의 각 대학에서 전개된 유신체제 반대운동.

[역사적 배경]

1973년 반유신운동박정희 정권이 독재 기반을 강화하여 영구 집권을 꾀하였던 유신체제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대구의 각 대학에서 전개되었다.

[경과]

대구에서 전개된 1973년 반유신운동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의 첫 유신 반대운동으로 촉발되었다. 1973년 10월 말 경북대학교 법대생이 언론의 중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계기로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영남신학교[현 영남신학대학교] 등 대구의 각 대학교에서 12월 말에 이르기까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대구에서의 1973년 반유신운동은 1973년 11월 경북대학교 교양과정부 4층 건물에서 1972년에 결성된 경북대학교 이념 서클 한국풍토연구회[한풍회] 회원 40여 명이 모여 경북대학교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 명의의 반독재 민주 구국 선언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사태로 이어졌다. ‘박정희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시위대는 경북대학교 일청담 부근 로터리를 거쳐 경상북도청 다리 중간까지 진출하며 유신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는 또한 ‘반민주적인 유신헌법 폐지하고 민주 헌법 제정하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 ‘노동자·농민을 위시한 저소득층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등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구속되기도 하였다.

[결과]

고등학교까지 시위가 확산되자 1973년 12월 유신정권은 휴교령과 종강 조치를 취하며 대응하였다. 거세지는 학생 시위에 초강경 정책으로 일관하던 박정희 정권은 1973년 12월 7일 구속 학생을 전원 석방하고, 처벌을 백지화하였다. 그러나 석방된 학생들 대부분이 강제 징집을 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북대학교를 시작으로 대구의 각 대학에서 전개된 1973년 반유신운동은 전국 대학가의 유신 반대운동에 불을 붙였으며, 이후 각계로 확산되어 사회 지도층 인사와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기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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