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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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洪彬 |
영어공식명칭 | Lee Hongb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시용 |
출생 시기/일시 | 1923년 6월 23일 - 이홍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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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1년 2월 15일 - 이홍빈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다혁당 결성 참여 |
수학 시기/일시 | 1941년 12월 31일 - 이홍빈 대구사범학교 퇴학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2월 8일 - 이홍빈 대전지방법원 예심에서 재판 회부 결정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11월 30일 - 이홍빈 대전지방법원에서 실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3월 23일 - 이홍빈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이홍빈 당진중학교 교사 부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 이홍빈 대통령표창 수여 |
몰년 시기/일시 | 1975년 5월 22일 - 이홍빈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이홍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삼인리 -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 |
거주|이주지 | 대전 - 대전광역시 |
거주|이주지 | 강진 - 전라남도 강진군 |
거주|이주지 | 광주 - 광주광역시 |
학교|수학지 |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다혁당 당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홍빈(李洪彬)[1923~1975]은 1923년 6월 23일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여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이홍빈은 1941년 2월 15일 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이도혁(李道赫)·김효식(金孝植)·이동우(李東雨)·유흥수(柳興洙)·이종악(李鍾岳)·박호준(朴祜雋)·문덕길(文德吉)·조강제(趙崗濟)·문홍의(文洪義)·최태석(崔泰碩)·이주호(李柱鎬)·서진구(徐鎭九)·김성권(金聖權) 등과 함께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조직 다혁당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기존에 결성되어 있던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문예부와 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독립을 위한 실력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이홍빈은 다혁당의 연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다혁당원들은 역사와 문화 관련 서적을 돌려보고 독후감을 발표하였으며, 국내외 정세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또한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는 대구 앞산 등지에서 학교에서 배운 교련 내용을 바탕으로 군사훈련을 하였으며,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교사가 되어 제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유능한 인재를 길러 독립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윤독회(輪讀會)[문예부의 전신]가 발간한 항일 문예지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 드러났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홍빈도 이때 체포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 12월 31일 대구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고, 이에 불복하여 상고를 하였지만 1944년 3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이홍빈은 1952년 전라남도 당진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광주 등지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75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홍빈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