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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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泰吉 |
영어공식명칭 | Lee Taegil |
이칭/별칭 | 여암(艅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시용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태길(李泰吉)[1920~2014]은 1920년 9월 29일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문예부와 연구회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호는 여암(艅巖)이다.
[활동 사항]
이태길은 대구사범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동급생 강두안(姜斗安)·박찬웅(朴贊雄)·박효준(朴孝濬), 4학년생 문홍의(文洪義)·유흥수(柳興洙)·이동우(李東雨), 3학년생 김근배(金根培)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결성하였다. ‘문예부’로 이름을 지은 것은 표면상으로는 문예 활동을 표방함으로써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문예부원들은 매주 토요일에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모여 감상하고 비평하며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고, 이때 조선의 역사와 문화 및 시국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다. 1941년 3월 초에는 부원들의 작품을 편집하여 기관지 『학생』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태길은 1941년 1월 23일 오후 8시경 장세파(張世播)·김영복(金榮宓)·최낙철(崔洛哲)·윤덕섭(尹德燮)·이무영(李茂榮)·안진강(安津江)·강두안(姜斗安) 등과 함께 또 다른 비밀결사인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대구사범학교 교과목을 중심으로 교육부를 비롯한 9개 부서를 두었는데, 이태길은 문학부 책임을 맡았다. 연구회 성원들은 2월 1일경부터 3월 17일까지 6회에 걸쳐 강두안의 하숙집과 소나무숲에서 모여 국제 정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각자 가장 좋아하는 학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독립을 위하여 협력·매진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졸업 후 국민학교 훈도로 봉직하게 되면 우수한 제자들에게 수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들을 양성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수재 교육의 경과 상황을 매월 1회 사무원에 보고할 것 등을 협의하였다. 이태길은 1941년 4월 1일 창녕군 대합공립국민학교 훈도로 부임하여 학생과 학부형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등 연구회의 결의에 따라 활동하였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윤독회(輪讀會)[문예부의 전신]가 발간한 항일 문예지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 드러났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태길도 이때 체포되었고,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태길은 1957년 3월 경남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한 뒤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마산여고 교사를 시작으로 칠원중고등학교,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해동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1967년 3월 동해중학교 교감을 거쳐 1973년 3월 대동간호전문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75년 12월 부산 대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84년 6월 동천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직에서 물러난 뒤 1994년 10월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1995년 10월 광복회 부산지회장에 선임되었다. 이태길은 2014년 9월 14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태길의 저술로는 『국역 파한집』[문성출판사, 1980], 『화랑세기』[민족문화, 1989], 『긴 삶 숱한 고비』[태화출판사, 2000]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태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