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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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홍기승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
[원삼국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를 포함한 한강 하류 유역은 고대 국가가 성립하기 전에는 목지국(目支國)을 우두머리로 하는 소국의 느슨한 연합체인 마한(馬韓)의 영역이었다. 도봉구에도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삼국 시대]
1. 백제
백제가 건국되면서 도봉 지역은 일찍부터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온조(溫祚)가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내려와 위례성(慰禮城)[일명 하북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기원전 5년(온조왕 14) 지금의 한강 남쪽의 한산(漢山) 아래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위례성의 위치를 비롯해 『삼국사기』 기사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온조가 처음 도읍을 정한 위례성의 위치를 도봉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즉 정약용(丁若鏞)은 서울 혜화문(惠化門)의 약 3.93㎞[10리] 지점인 삼각산 동록(東麓)[동쪽 기슭]의 한양동(漢陽洞)에 옛 성터가 남아 있는 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 일대를 한양 고현(漢陽古縣)이라 부르는 점 등을 근거로 이 일대를 하북위례성으로 비정하였다. 혜화문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으므로 정약용이 비정한 위치는 오늘날의 성북구, 도봉구 일대로 볼 수 있다. 또 최근에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서울 연산군 묘 인근에 있는 방학동 토성(放鶴洞土城)을 하북위례성으로 보는 견해도 나왔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토대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 백제가 어떤 형태로 도봉 지역을 지배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대 담로(擔魯)라는 지방 통치 조직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도봉 지역에도 담로가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 고구려
고구려가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가면서 4세기 중반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빈번하게 충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백제가 우위에 있었지만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가 백제를 압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396년(아신왕 5)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잠시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 도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가 완전히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한강 이북 지역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였는데 도봉 지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북한산군의 별칭(別稱)에 대해 『삼국사기』 지리지에 ‘평양(平襄)’으로,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3. 신라
551년 백제 성왕(聖王)은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함께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당시 백제가 한강 하류의 6군(郡), 신라가 한강 상류의 10군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므로 도봉 지역은 백제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2년 뒤인 553년(진흥왕 14) 7월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의 영토를 빼앗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도봉 지역은 신주의 직할지로서 별도의 군이나 촌(村)으로 편제되지 않고 주의 장관인 군주(軍主)의 통치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676년(문무왕 16) 나당 전쟁(羅唐戰爭)에 승리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685년(신문왕 5) 전국을 9개의 주(州)로 나누고 5개의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지방 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그 결과 도봉 지역은 한산주(漢山州)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 통일 신라는 전국의 지방 행정 단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주군현(州郡縣)의 명칭을 고쳤다. 이 과정에서 한산주는 한주(漢州)로 개칭되었으며, 도봉구를 관할하는 행정 구역으로 한양군(漢陽郡)이 설치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양군의 중심지를 ‘양주(楊州) 옛터’라고 밝혔는데, 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일대로 비정된다. 한양군은 황양현(荒壤縣)[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과 우왕현(遇王縣)[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한양군 북쪽에는 고려 시대 견주(見州)이자 조선 시대 양주의 전신(前身)인 내소군(來蘇郡)이 있었다.
군현제(郡縣制)를 바탕으로 한 신라의 지방 지배는 9세기 이후 조금씩 느슨해졌다. 이를 틈타 지방 유력자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면서 호족(豪族)들이 각지에서 새롭게 등장하였다. 도봉 지역을 거점으로 한 지방 유력자나 호족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후삼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도봉 지역은 일찍부터 궁예(弓裔)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898년 왕건(王建)을 보내 양주와 견주를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은 당시의 사정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