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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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집필자 | 이현욱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동일 성관(姓貫)의 사람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촌락.
[개설]
집성촌은 대체로 한두 개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성씨 집단이 특정 지역에 세거(世居)하면서 당해 마을의 인적 구성 및 운영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곳을 지칭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마을은 그 구성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으나 대체로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양반을 중심으로 구성된 집성촌은 대체로 조선 후기인 17세기 이후를 기점으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혼인 풍속이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서 사위 또는 외손이 처가나 외가 인근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한두 개의 주도적인 성관이 존재하기 어려웠고, 거주 성씨의 출입이 빈번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특히 18~19세기에 들어서는 가족 및 친족 구조가 점차 부계(父系) 위주로 바뀌면서 이러한 양상에 변화가 생겼다. 부계 성씨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형성되고 주도적인 성관이 부각되며, 그 성씨의 인구 비중이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집성촌이 형성되는데, 그 원인으로는 적장자(嫡長子) 중심으로의 상속 제도 변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과 예학의 발달, 종법적 가족 질서의 형성을 들 수 있다.
즉 조선 전기에는 남녀의 차별이나 친손, 외손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아 재산 및 봉사(奉祀) 상속에서의 차별이 크지 않았다. 처가 또는 외가 지역 정착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관습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를 지나면서 적장자 중심의 종법적 가족 질서가 확산되고 차등 상속이 일반화되면서 장자(長子)가 부모의 거주지를 이어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특정 촌락에 동성동본의 성씨 집단이 세거하게 되었다. 여러 성씨가 잡거(雜居)하던 것에서 특정 성씨 집단의 집성촌으로 변화하는 것에는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성씨의 사회적·경제적 기반 확보가 중요한데, 주로 관직이나 학문적 성취, 대규모 토지와 노비의 소유 등이 그것이다.
[도봉구의 집성촌]
도봉구의 집성촌으로는 서원 마을 일대를 들 수 있다. 이 지역에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전주 이씨(全州李氏),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가 세거하고 있다.
광산 김씨들은 수사공파(水使公派)에 속하고 18세기 들어 도봉구 지역에 묘를 쓰면서 일부 후손들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거주 중인 광산 김씨의 가장 높은 직계는 35세 김재의(金在義)[1838~?]로서 그의 묘가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에 있었다고 한다.
전주 이씨는 효령 대군파에서 분기한 영산부정공파(榮山副正公派)이다. 그러나 도봉구 지역에 정착하게 된 시기나 사유 등은 과거의 기록이 실전되어 알 수 없다.
함열 남궁씨는 조선 전기부터 도봉구 지역에 묘역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입석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남궁숙(南宮淑)의 묘표를 통해 1574년(선조 7) 이전에 이미 묘를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도봉구 지역에 거주하는 남궁씨는 18세손 남궁회(南宮恢)의 자손들이고, 인근에 선조들의 단(壇), 종친회 사무실, 재실(齋室) 등이 있다.